'깊을 심'을 씁니다
브런치 오랜만이다!
구독해주셨던 분들은 "얘 누구였지?"하고 단박에 구독을 끊으실 수도 있겠다. 마지막 글이 브런치 무비패스로 본 [폴란드로 간 아이들] 리뷰였고, 10월 25일에 업데이트했으니 한 달도 넘게 부재중이었다. 브런치 무비패스를 계속 신청하고 싶지만 용인에서 퇴근하여 7-8시까지 서울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시사회 초대 메일을 무시하는 중이다. 글은 꾸준히 쓰고 있다. 노트에 끄적이는 낙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샤워할 때 줄줄 내뱉는 말들이 기막힌 에세이가 될 수 있었는데, 항상 샴푸를 씻어내면서 같이 씻겨 내려가버려 붙잡을 수 없었다.
자주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고 있다. 혼자 시를 쓰고 있다. 브런치를 오랫동안 비운 이유도 (핑계지만) 신춘문예 준비 때문이었다. 내 인생은 벼락치기로 요약될 수 있는데 제 버릇을 남 못 줘서 신춘문예도 벼락치기로 준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해 신춘문예는 포기했다. 겨우겨우 어떻게 완성한 시 5편을 동아일보에 투고했지만, 조선일보에는 따로 투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아일보에 투고하고, 조선일보에 낼 시를 다시 추리는 동안 내 안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답을 못 찾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나는 왜 등단하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못 찾았다.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3)명예욕 때문에 등단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우주의 모든 기운과 운빨과 타이밍을 모아 등단했다고 가정할 때, (4)작가가 될 수 있을 만큼 나의 문학 세계는 깊고 넓은가라는 질문에도 답 하지 못했다.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쌓아 올리기로 했다. 진정으로 시인을 꿈꾸는 시인 지망생들을 조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시인 지망생의 지망생이었다.
라고 위에서 말했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 교수님과 친한 학생이 아니었다. 어느 교수님과도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고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 느끼고 있어 졸업한 지 몇 년 만에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 졸업한 지 N년만에 한 번도 찾아뵙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시를 들고 간다고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계속 시를 쓰고 있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ㅜㅜㅜ
물론 저것보다는 정중하게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은 인자하게도 '환영해'라는 답장을 주셨고, 나는 교수님께 보여드릴 시 몇 편을 가져갔다. 교수님이 내 시를 읽고
"이 구절을 읽을 때 너의 파토스가 안 느껴져. 네가 왜 이 구절에 꽂혔는지가 안 느껴진단 말이야."
라는 말씀을 해주실 때 나는 찌질이처럼 울어버렸다(!!). 내 시가 별로라는 말 때문에 속상했던 게 아니라, 내가 항상 느끼고 있는 한계점을 남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년 만에 찾아뵌) (별로 안 친했던) 교수님 앞에서 울먹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저는 시를 쓸 때 저를 드러내는 게 너무 싫어요.. 그건 시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작품 속에서 저를 드러내는 게 너무 싫어요..(눈물)"
교수님은 살짝 당황하신 듯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으시고 나에게 따뜻한 격려와 함께 현실적인 개선점을 제시해 주셨다.
원래는 30살 되는 해에도 등단에 실패하면 접으려고 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명예욕.. 난 영원히 시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들어 남의 에너지를 흡수하러 갔다.
열심히 꾸며놓은 카페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다. 인스타 감성의 카페를 좋아한다기보단 누군가가 열심히 꾸며놓은 공간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가치관이고 표현이니까. '타인의 열심'을 훔쳐보고 평가하는 관음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이패드를 가져갔다면 아마 카페에서 일기를 썼을 텐데. 아쉽게도 난 이 날 책 두 권만 가져갔다. 하나는 '어린 왕자'였고, 하나는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였다.
어릴 때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포털에 '어린 왕자 독후감'을 검색하여 베껴 제출했었다. '어린 왕자는 나이 들어 읽으면 또 다르답니다'라는 후기들에도 코웃음 쳤다. 그때 안 보였던 것들이 마음에 닿는 걸 보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하고,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어른들을 위한 동화하는 것에 실망한다. 하지만 과거에 복선이 있었다면 어떤 사건이든 그럴싸해지는 법이다. 초등학생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이해가 되는구나!하는 순간을 어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어린 왕자는 필독도서가 됐는지도 모른다.
황병승 시집을 빌린 이유는 나에게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병승 시인에 대한 불미스러운 사건... 을 제쳐두고 말할 수가 없겠지만. 나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자기 파괴적인 사람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런 성향을 띤다. 이 성향은 극과 극에 존재한다. 아주아주 게을러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아주아주 힘이 넘쳐서 모든 것을 부시고 다니거나. 난 극도의 게으름과 극도의 폭력성 모두 다 자기 파괴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은 자기애가 넘치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자리 잡는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황병승 시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다만 황병승의 시를 읽을 때 나는 잠깐이나마 자기 파괴적으로 변하게 된다. "다 엿 먹으라 그래"라는 말이 날 감싸 안는다! 짜릿한 순간이다. 점잖던 우리의 시 세계에 이렇게 키치하고 솔직한 언어들을 박아 넣은 황병승을 좋아한다.
좀 다듬고, 요약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샤워하면서 생각했던 문장들은 거의 다 쓴 것 같다. 개봉하는 영화들은 꾸준히 보고 있다. 시간 날 때 넷플릭스로 이미 개봉한 영화들도 보고 있다. 다음 글은 영화 리뷰가 되면 좋겠다. 글쟁이의 숙명 '내글구려 병'이 어서 치유되기를 바란다. 당분간은 '타인의 열심'을 훔쳐보는 소비자로 돌아가기로 한다. 시, 소설, 잡지, 영화를 열심히 읽고 보고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