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Aug 03. 2021

유영국, 심미적 산(山)의 거장

-추상화의 거장

세상을 구원하는 산은 삼각형입니다. 무게중심을 잃을 염려 없는 가장 안정적인 자세로 먼 옛날부터 지상을 굽어봅니다. 산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가는 정점에서 하늘과 만납니다. 산의 삼각형 두 변은 사실 360도 아우르는 원형입니다. 원과 삼각형이 만나는 구조입니다. 이 독특한 지형과 원만한 품성은 덕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은자들은 산을 좋아합니다.


산은 자신을 정화시킵니다. 찾아오는 산새와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르는 자의 등짐과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줍니다. 오장육부 근골격계를 젊어지게 만듭니다. 산은 언제나 거기 있고, 밤이 되면 세상의 등을 가만히 밀어냅니다. 온 우주가 내려오는 밤하늘에 머리를 묻고 별들과 소곤거립니다. 산의 넓은 어깨너머로 석양이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바다를 만드는 물줄기도 산에서 연유합니다. 그 많은 나무들을 먹여 살리고도 맑은 물을 아래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산은 천연 정수기입니다.  


울진의 산들은 어찌 된 셈인지 바다 코앞까지 발을 뻗습니다. 아침이면 일출을, 저물녘에는 일몰에 도취된 산들은 물길을 열어주면서 바다를 배웅합니다. 바닷가 산들이 더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일출과 일몰이 드리우는 채색의 차이점을 알려면 울진의 산과 바다를 관찰하면 됩니다. 일출이 관장하는 붉음은 가벼운 탄성과 더불어 구김살 없는 진홍색 장미이거나 투명한 진주 위에 어린 핑크빛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장엄한 비장미를 자아내는 일몰의 붉음은 검정 드레스를 입은 마녀의 빨간 립스틱 빛깔만큼 강렬하고 화려합니다. 그 산과 바다를 두 눈에 담고 세상의 모든 빛깔을 탐미한 소년은 자라나서 화가가 되었습니다. 서울 약수동 조그만 화실에 앉아서도 자유자재로 고향의 산천을 그대로 내려다본 듯이 그렸습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고 말했다지요. 선, 면, 색채로 구성되어 실제 모습보다 더 사실적인 추상화로 말입니다. 단순함은 깊은 통찰력에서만 간파되는 그 무엇입니다.


황금비율로 계산된 듯한 규칙적인 도형의 배치와 함께 세련된 색감으로 물들인 자연의 조화로운 구성은 너무도 멋지고 환상적입니다. 붉은색이 지배적인 화가의 산들은 톤을 달리하며 강약을 조절하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보색 계열 외딴 산봉우리 하나 우뚝 선 채로 자주 등장합니다. 군계일학처럼 개성적인 이 산에게서 특별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요. 날아가는 잿빛 구름 한 점에 가려져 빛나는 노을을 받지 못한 산은 어쩌면 평범한 삶을 거부한 화가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시실 이동노선을 쉽사리 따라가지 못한 까닭은 형언할 수 없는 무형의 세계를 포착한 듯이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의 중력처럼 흐트러진 무질서 속 엄연한 질서를 마주 대하며 발길이 자꾸만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무제><작품>으로 이름 붙인 그림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세상 가장 깊은 내면의 고독과 독백을 듣게 되어 서늘한 기운이 스쳐지납니다. 자, 지금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실낱 같은 물줄기들이 모이고 보태져 합류하는 이 < 계곡 >은 불영계곡이 아닐까요.

완만하게 침식당하고 있는 화강암 내부는 맨틀을 지나 뜨거운 용암의 숨결과 맞닿은 지각의 내부, 핵을 상징하는 붉음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열광의 도가니를 식히는 계곡은 지구 상 가장 뜨거운 곳일지도 모릅니다. 칼로 자른 듯이 ‘U’ 자형 단면을 뚝 떼어내어 보면 바위 잔에 담겨 출렁이는 계곡물이 민트색 칵테일처럼 보입니다. 훌쩍 마시고 싶은 일급수를 흘려 보내는 계곡, 한여름 청정 피서지로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휴식하게 합니다. 그 품에 들면 금강송 솔바람이 정신을 맑게 여과시켜 줍니다. 아름다운 보석 자수정이 백조자리 별빛처럼 반짝거립니다. (자수정 광산이 있음)  소금과 미역을 져나르던 보부상들의 옛이야기를 십이령 고갯길이 들려줍니다. 불과 쇠를 단련하고 식히는 대장장이의 대장간 같은 그림입니다.


해마, 말미잘, 갈조류들이 생태의 신비를 드러내는 동해 바닷가에는 백사장 근처 바위에 한 발 딛고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들이 산재해 있지요. 특히 물속에서 비치는 빨간색은 너무나 선명해서 누군가가 흘린 피를 상상하게 되어 혼자 무서웠던 적이 많았는데요. 총천연색으로 광합성을 하는 수중세계는 지상보다 더 화려하답니다. 바다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독특한 시각은 제목 < 바다풀 >이 아닌 외계 생명체를 포착한 것만 같습니다.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색채의 프레임 속에 첩첩이 우거진 산맥의 등뼈를 바라봅니다. 장방형 경사면과 산봉우리 세모가 어우러진 도형들의 조합은 잘 계산된 수학적 조감도 같습니다. 테두리를 장식한 색깔들은 물론 산의 사계에 다 들어있습니다. 원근법을 조율하는 화가의 시선이 카메라 앵글을 조이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백두대간 기개를 닮아서 어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당한 자존심은 산이 많은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산의 어깨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일몰 무렵 사람들은 지친 어깨를 내려놓고저 귀가를 서두릅니다.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던 아버지의 어깨도 흔들릴 때가 있지요. 서로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는 저녁, 높게만 보이던 산도 정상에서 내려와 검은 쪽잠을 잡니다. 착한 어부의 배 한 척 빌려 타고 밤새 태평양을 횡단하고는 찬란한 아침 태양과 함께 귀항할지도 모르지요. 평생 산이라는 오브제를 내면화시킨 화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순 살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이후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두 개의 달이 뜨는 밤 천상의 달은 엷은 구름에 빛을 가둡니다. 땅거미를 잡을 듯이 바짝 엎드린 이등변 삼각형은 이 편과 저 편을 가르는 경계에서 상징적 역할을 합니다. 밤바다에 뜨는 저 달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내 마음의 상념인 하얀 달을 잡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요. 달이 사라지면 그만인 것을.

모서리를 드러낸 검은 쪽배를 타고 신비로운 색채로 꿈을 꾸는 바다를 건너서 저 산을 오르고자 합니다. 산은 기어이 허락해 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작품 < 산-Blue >는 천상천하 기하학적 형태로 산을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산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기호화하여 해가 뜨고 지는 원리도 산에 의한 인력으로 움직여지는 듯 역동적입니다. 뾰족한 산이 우리 눈에 보이기까지 뿌리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반의 모습을 마름모꼴로 들추어낸 동상이몽의 패턴들이 하늘과 우주를 점령합니다.

이타불이(理他不二)의 마음으로 해가 달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고,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상호 진동의 원리, 파동으로 이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는 우주적 이치를 표현한 이 대작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꾸만 그 의미를 생각하였답니다.


단 한 장의 그림으로 < 사계절 >을 이토록 단순하고 명확하게 그려낸 그림이 또 있을까요. 한 계절을 담아내기에도 부족한 화폭인 줄 알았는데요. 산정에 흰 눈을 얹고 7,8부 능선에서는 꽃빛 단풍을 안은 버거움이 한창인데 발치에서 핀 신록이 녹음을 어우러지게 합니다. 저변에서는 이 모든 변화무쌍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 어둠이 자리 잡고, 하늘은 쾌청합니다. 저는 이 그림에서 한 사람을 바라봅니다.

차가운 이성이 자리 잡은 반백의 머리에, 뜨거운 감성이 활화산처럼 드리운 가슴으로,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손발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몸짓을 할 줄 아는 지혜로운 한 사람을. 


세상 모든 강물을 거꾸로 올라가면 물길은 점점 작아져서 산속으로 사라집니다. 세상 모든 길은 산에서 비롯되어 흩어집니다. 산은 모든 길의 근원이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인생도 오리무중 지름길이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이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가 걸었던 길을 생각합니다. 오류를 거듭한 나의 길이 새롭게 보입니다. 막혔던 길도 산에 가면 뚫립니다. 산에 가는 이유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명제 ‘시간’은 태양과 직결됩니다. 가장 힘센 중천의 해가 서쪽으로 비켜나기 직전 황금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요.

마땅히 이룩해낸 업적도, 명성도, 재산도 없는 지금, 볼품없는 지금, 강렬하게 살아있는 심장이 떨리는 바로 지금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태양이 있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태양이 지면 깜깜한 어둠이 찾아오죠. 나의 생명이 가리키는 시각은 지금 몇 시일지 생각해봅니다. 에너지로 가득한 써클은 구를 수도, 날아갈 수도 있는 자체 동력입니다. 삐죽한 모서리와 가시를 없애는 일, 인생을 순행하는 길입니다. 해가 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미세한 빛 한 줄기에 편승하는 희망을 붙잡는 한 < Circle-C>는 영원할 테니까요.


뇌우가 퍼붓는 봄밤 산은 묵은 허물을 벗고 산뜻한 초록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누가 흠뻑 젖은 봄 산의 이 기쁨을 알아챌까요. 상큼한 빗물 내음과 탈바꿈을 시도하는 생동감이 화면 가득 꿈틀 되어 감흥에 도취됩니다. 가만가만 내리는 봄비는 꽃눈이 간직한 생체시계를 깨우지만 잠에 취한 겨울산을 흔들어 깨우진 못 합니다. 천둥번개와 함께 노란 섬광을 밝히면서 퍼붓는 폭우만이 거인의 잠을 깨울 수 있지요.

어리석은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한 줄기 벼락같은 뇌우가 언제 지나갔는지 떠올리게 만듭니다. 정말 사랑스러운 그림입니다.


물과 불이 만나면 물이 이깁니다. 선과 악이 만나면 선이 이깁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불씨는 남아서 또 다른 불을 지피고, 악의 씨는 남아서 또 다른 악을 저지릅니다. 영원한 이분법의 세상 이치를 극명하게 나타낸 그림으로 보입니다. 부등호 기호처럼 입을 쩌억 벌린 붉은 손아귀에 하얀 냉기는 금방 잡아먹힐 것 같지만 냉기류 아래 저변에는 더 강한 빙하의 푸른 서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 불길을 다 잡고도 남을 냉혹함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뜨거움과 차가움이 서로 어우러져 상생하게 된다면 무한한 조화로움이 가능하겠지요. 아래 그림 < 해토 >처럼 말이죠.


깊은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반사하는 건너편 두 눈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잠 잘 때나, 거짓말을 하거나, 나쁜 생각을 할 때에도. 깜박이지 않아도 결막염에 걸리지 않는 눈은 절대 감는 법이 없습니다. 

그 눈은 공정합니다. 심판합니다. 기록합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부처의 눈으로. 창밖 어둠 속에서 불 켜진 창 내부를 모조리. 시선은 말합니다. "나는 네 속에 있음을 기억하라."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영원한 두 눈, 나의 영혼은 얼마나 늙었길래 저리 지쳐 보이는 걸까요. 때로는 애걸하듯이, 나를 좀 돌아봐 달라고, 잊지 말라고 묵언합니다. 내 안에 고인 옹달샘이 다 마르기 전에! 

화가는 자신의 내면에 이렇게 강렬한 시선을 의식하고 치열한 예술혼을 불 지핀 것 아닐까요. 


바람이 붑니다. 부드러운 연둣빛 새순 같은 봄바람이... 논두렁에 돋아난 돌미나리 해쑥을 낭창낭창 흔들며 보리순을 쓰다듬으며 경직된 마음속으로도 불어옵니다. 어느 누가 봄바람에 설레지 않을까요?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러 가는 할머니도 봄을 탑니다. 진분홍 잠바 꽃무늬 몸빼바지 어여쁘기만 한 걸요. 세상사 봄바람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격노한 심정도 배반도 탐욕도 고개 숙여 성찰하고 용서하고 내려놓으면 일렁일렁 평탄히 넘어갈 것 같습니다. 말랑말랑 동심으로 돌아가게끔 손짓하는 봄바람, 연근해 푸른 물결 출렁입니다. 봄이 깊어질수록 동해안 바람은 거칠어지지만 겨울을 물리칠 적에는 상냥하기 그지없습니다. 


1999년 그린 절필작입니다. 날개를 달고 지상을 박차 오른 산들이 일제히 비상합니다. 두 손을 합장하여 기도하는 이의 진심이 무위의 결을 쌓고 하늘을 감동시킵니다. 심장박동기를 달고서도 간절했던 붓을 그만 내려놓고자 하는 화가의 손은 떨리고 있고, 일평생 갈구했던 산들이 삼각형 모서리의 두 꼭짓점 부위를 떼어내어 날개를 달아줍니다. 이제 날아오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산꼭대기는 이 여정의 마지막 쉼터, 백색 광선이 다가와서 고단한 육신을 들어 올립니다. 광속으로 치닫는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창작 과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항상 뚫고 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품은 다음 작품을 위한 과정이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해야 되는 근거가 된다." 



근대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 ‘유영국, 절대와 자유’ 전시회는 그림과 대화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마법에 걸리도록 합니다. 고유한 에너지장을 형성하는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선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내재화된 은유, 철학적인 사유의 깊이를 그림이 떠안고서 해석하는 몫은 관람객의 역량에 달렸습니다. 수많은 나무와 짐승 물줄기 길을 품은 산의 생태와 첩첩이 우거진 산맥의 위용을 저토록 단순화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통찰력과 시선과 연필과 지우개의 습작이 필요했을까요? 처절하게 매달린 절대적인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고향의 산천을 아끼고 사랑한 애향심이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주었을 겁니다. 그 넉넉한 애향심의 그릇이 거대한 자연을 담을 수 있게, 예술로써 승화가 가능하도록 허락해주었을 겁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산이 들어간 거장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그리고 왜 지금껏 유영국 화가를 모르고 살아왔는지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유영국 미술관이 아름다운 울진의 동해 바닷가에 생기는 그날을 상상하고 기다리면서 내 고향의 산과 바다를 오묘한 깊이와 우주적 세계관으로 확장시킨 화가 유영국 선생님께 허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 전해드립니다.






그림 사진은 2016년 개최된 근대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 "유영국 절대와 자유" 전시회에서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이건희 소장 컬렉션 유영국 화가의 그림이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랍니다. 미처 못 본 이색적인 그림이 다수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기회가 되면 새롭게 마주 서서 감상하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백자, 옛 향기 속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