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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Aug 30. 2021

귀한 손님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밤 10시가 다 돼가는 늦은 시각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벗어놓은 신발도 없이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걸까.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올 때 문턱을 넘던 손님과 딱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가을장마철 습기를 타고 바깥에서 묻혀온 게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동 경로를 모르겠다. 곰곰이 추리한 끝에 실마리가 잡혔다. 손님의 최초 출발지는 김해였던 것 같다. 승차권이 없으니 확인할 순 없지만 그곳은 비타민 A, C가 풍부하고 유황화합물 알싸한 향이 나는 기양초 주생산지이다.      


상경할 때는 트럭을 타고 왔을 것이다. 본인도 미처 몰랐겠지.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되리라곤. 불빛이 화려하고 왁자지껄 시끄러운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장을 보고 있었다. 직원 눈에 띌까 봐 기다란 초록잎 속에 꼭꼭 숨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몸을 압박하던 무게감이 덜해지면서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간다. 이제 내 차례, 잔뜩 웅크린 채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 마스크를 쓴 어떤 여자가 내가 숨은 비닐봉지를 앞뒤로 살피더니 카트로 옮겼다. 잠시 후 수평 진열대가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바코드 찍는 기계음과 함께 나는 결제되었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나의 정체를.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거야. 새벽이슬 달린 채소밭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오르락내리락 미끄럼 타면서 놀고 있었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있어서 점액을 힘들여 분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 한 모금 축이고 주르륵 미끄럼, 먹이는 널리고 널렸다. 천국이었다. 포식자 개구리 잠자리 새들 눈에 띄지 않게 밤에 쏘다니고 놀았다. 실컷 놀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덜컹덜컹 굉장히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바퀴 구르는 진동에 놀라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몸이 후덜덜 떨렸다.      


나를 집어간 여자도 차를 몬다. 이전 트럭보다는 승차감이 좋다. 어두컴컴하니 졸리고 피로가 몰려온다. 꼬박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 어디로 실려 가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두자… 빠지락 빠지락 포장 비닐 만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여자가 사는 집인가 보다. 행복한 집인가, 불행한 집인가, 살필 틈도 주지 않고 문 여닫는 소리가 나면서 추운 곳에 들어와 버렸다.   

   

여긴 어디지? 갑자기 겨울이 돼버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름과 겨울이 분리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날씨 변동이 이렇게 극심한 지역에 엄마가 나를 살아가게 낳진 않았을 텐데, 이상하다. 그나마 비닐에 감겨있어서 온도 전달이 제한적이다. 야채 깊숙이 비비적 들어갔다. 이 상태로 48시간 이상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정머리 없는 여자 같으니라구. 나를 얼려 죽일 셈인가. 손발이 얼어붙어 저체온이다. 아이고 추워라. 이제 살고 죽는 일은 그 여자 소관이다. 오, 제발 나를 꺼내 주세요!

여자도 예민한 더듬이가 달려있나 보다. 이 미물의 소원을 들어준 걸 보면. 갑자기 온기가 느껴졌다. 겨울 문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언 몸이 노곤노곤 말랑말랑 녹았다.      


기지개를 켜고 더듬이를 꺼내본다. 상하좌우 360도 정상작동 이상 무. 가만가만 여자가 안 보인다. 이 틈을 타서 일단 나가봐야겠다. 여기 있다간 언제 또다시 시베리아로 끌려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탈출하고 보자. 여자는 요리하려고 부추를 꺼내 놓은 게 분명해. 매끈한 아일랜드 식탁은 어찌나 높은지 한참을 내려가도 바닥이 안 보인다. 한 번도 탐험한 적 없는 높이다. 사실 나는 아직 어린 편이다.    

 

드디어 수직 낭떠러지가 끝나고 편평한 수평 길이 시작되었다. 마룻바닥에 저녁 햇살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저녁은 야행성인 내가 활동을 개시하는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얼마 만에 맛보는 바람인가. 쉬쉬 감상 타령 그만, 여자가 나타났다. 아일랜드 식탁 하단 뒤편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음악 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흐르는 수돗물에 부추를 씻기 시작했다. 아, 아찔하여라. 탈출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하수구에 떠내려갔거나 음식물 쓰레기 통에 처박혀 질식할 것이다. 끔찍하여라. 이곳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가자.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그곳으로 가면 살길이 열릴 것이다. 싱그러운 풀잎 나뭇잎들이 사그락사그락 그네를 태워주는 그곳으로.


부지런히 기어가고 있는데 숟가락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4인 가족이 모여앉아 맛있게 저녁 식사하는 모습이 내 더듬이 눈에 포착되었다. 행복해 보인다. 그리워라. 내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 친구들 보고 싶다. 목이 마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싶다. 시끄러운 바퀴에 실린 이후 물다운 물을 마시지 못했다. 윤활유 역할을 하는 점액이 말라붙어서 이동에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 내음이 난다. 그리로 가자. 오아시스가 있는 게 분명해. 더듬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여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포악한 사람 같았으면 밟혀버릴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었다.     

“어머머, 얘 좀 봐. 민달팽이잖아. 어디서 나타났지?”

이 집 딸내미들도 후다닥 뛰어오더니 발각된 내 정체를 보고 호들갑이다.

“너무 귀엽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서 여기저기서 찰칵찰칵 유명 연예인이 된 기분이다.

“엄마, 우리 전에 아파트 살 때 담장에 얘네 진짜 많았었는데‥ 그치.”

“아빠-”

저쪽에서 무겁고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온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찮다.

두렵다. 그는 새하얀 종이 위로 나를 옮겼다. 이어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내 몸을 새털처럼 휘리릭- 바람 속으로 날려 보낸다. 비행기 탔다. 비행기는 빙그르르 돌더니 둥근 나뭇잎 위에 사뿐히 착지하였다. 

휴, 살았다.     


1박 2일 우리 집에 체류한 민달팽이 방문기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하게 내쫓았다. 녀석을 처음 마주친 순간 자연의 품으로 즉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수로 왔고 여긴 네 살 곳이 아니니까. 전부터 각인된 민달팽이 모습이 좀 징그럽게 여겨졌다.

      

우리 집에 온 녀석은 귀여운 인상이었다. 부추 봉지에서 탈출하여 우리 집 마룻바닥을 기어 다닌 시간은 어림잡아 세 시간 이상이다. 녀석은 살길에 대한 방향감각을 정확하게 예측 진로를 잡았다. 만일 다른 데로 기어갔으면 말라죽었을 것이다. 더듬이를 틀어서 그대로 안방 경유 베란다로 나가면 물이 고인 항아리가 있고 창문 밖에는 1층 정원이 가까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는 밤새 안방에 감금되었을 것이다. 내 눈에 띄었기에 목숨을 건졌다. 녀석을 내보내고 나서 다음 날 알았다. 집에서 키울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는 양배추를 먹여서 하루 이틀 기운 차려서 내보낼걸. 물도 먹여 보낼걸. 너무 야박했다. 귀한 손님 대접 제대로 못 해줬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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