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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15. 2021

2. 나의 의식주

- 옷 이야기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연간 기온차가 가장 큰 악조건에 속한다. 한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섭씨 35℃ 내외 푹푹 찌는 더위를, 한겨울에는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동장군이 내려와서 –10℃ 아래로 뚝 떨어지는 얼음 왕국으로 우릴 데려간다. 양극단의 기후가 널뛰기하는 극동 아시아 반도 국가답게 사람들 습성도 동작이 재빠르고 다혈질이다.   

   

자연히 계절별 의류 구매력이 높고 소비량이 많다. 헌 옷 수거함에 넘쳐나는 그 많은  옷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세계 각지로 리사이클되는 이 옷들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 대원들이 우리나라 국군 명찰이 달린 군복을 입고 있어 화제가 되었다. 제3세계 오지 주민이 우연히 얻어 입은 옷 주머니에 우리나라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로또 복권처럼 들어있었다고도 한다. 이 사람은 한국 관광객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환전하였다.      

튼튼하고 질긴 옷들이 유행이 만들어내는 짧은 유통기한에 소비되고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외모 지상주의 도구로 전락하여 개성 넘치고 톡톡 튀는 아이템들 속에서 베이직 클래식 캐주얼 패션은 스탠더드 아이콘이다.      


옷 입는 스타일은 그 사람의 취향과 성격 일부를 반영한다. 색상이 말해주는 시각적 효과는 다채롭다. 밝다 환하다 화사하다 시원하다 어둡다 칙칙하다 유치하다 열정적이다 세련되다, 말한다. 스타일은 더 구체적이어서 심플룩, 에스닉룩, 치렁치렁 레이어드룩, 럭셔리룩, 오피스룩, 아웃도어룩 등등 입는 용도와 취향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같은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베스트 드레서, 워스트 드레서가 되기도 한다.   

  

색상은 오장육부와도 연관된다. 폐는 흰색, 간은 초록색, 위장은 노란색, 심장은 붉은색, 신장은 검은색을 의미한다. 특정 장부의 기능이 약해질 때 자신도 모르게 그 색깔의 옷을 입어 기운을 보충하려는 심리가 발동한다는 얘길 들었다. 예를 들어 신장 기능이 안 좋아지면 검은색 옷을 찾게 된다.    

    

어쩌면 패션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핵심은 옷을 걸친 그 사람의 눈빛 말투 걸음걸이 언행이 가감 없이 본질을 말해준다. 호모 사피엔스는 위장에 능하니까 의상이 최소한의 실마리는 제공해준다. 나는 옷을 충동적으로 구매하고 쉽게 버리는 패스트 컨슈머가 아니다.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취향은 쓸데없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      

18℃ 내외 최적의 온도를 오르내리는 봄가을은 동일 의류를 입을 수 있어 다행이다. 바지에 셔츠 한 벌로도 멋을 낼 수 있다. 일교차가 큰 아침저녁으로는 카디건을 걸치면 된다. 조금 더 기온이 내려가는 완연한 가을 날씨에는 울 카디건에 스카프를 두르면 보온효과가 있고 제일 좋아하는 차림새이다. 청바지는 무더운 여름 빼고 사계절 입는 최애 아이템이다. 그냥 편하고 상의 색상 매치하기에도 무난하다. 체중 변화가 거의 없어 20대부터 줄곧 같은 사이즈를 입는다. 허리살이 약간 붙긴 했지만 아직은 잘 들어간다.     


알록달록 폴리 소재 아웃도어룩은 싫어한다. 평상복이 산책 복장이고 심지어 산에 갈 때도 청바지나 진바지를 입는다. 옷감은 면 린넨 텐셀 울 천연소재로 만든 핏이 딱 떨어지는 심플 디자인에, 아이보리 오트밀 베이지 카키 겨자색 초콜릿브라운 밀키핑크 네이비 색상을 선호한다. 블랙 계열 옷은 안 입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옷은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아버지가 사주신 보라색 돕바이다. 여섯 살 겨울부터 아버지는 이듬해 입학하면 흑백 TV에서 매일 저녁 광고하던 분홍구두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두 눈에 사르르 녹는 눈깔사탕 같은 선물을 자나 깨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일곱 살 꼬마는 여린 햇살이 얼비치던 이른 봄날 아침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언니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입학하였다. 그날 오일장터 어디에도 신데렐라 분홍구두는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옷전에 데려가서 손가락이 다 덮이는 커다란 보라색 털돕바를 사주셨다. 어찌나 큰 옷을 사 입혔던지 손목 위로 깡충 소매가 짧아진 6학년이 될 때까지 입고 다녔다. 나중엔 속주머니가 너덜너덜 다 떨어져서 과자 부스러기가 돕바 등 아랫단 솔기로 들어가서 굴러다녔다. 분홍구두와 맞바꾼 오래도록 유년의 나를 포근하게 키워준 그 옷이 제일 따스했다.   

  

여자들의 필수 아이템 가방은 수수한 것들뿐이다. 어차피 들고 다니다 질리는 건 매한가지, 메탈 조각 번쩍이는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여자들의 심리를 알 듯 잘 모르는 바이다. 너나없이 드는 몰개성이 싫다. 명품백이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요, 부의 상징도 아니다. 그냥 자기 만족감? 들어서 가벼운 패브릭 가방이 좋다. 특히 여름철에는 직접 만든 천 가방을 메고 다닌다. 산뜻하다. 남들 시선에 민감하지 않은 나의 개성은 자신을 믿는 풋풋한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셀프 핸드메이드 가방들, 왼쪽 스카이 블루 가방은 동생 주고 파란 가방을 내가 메고 다닌다. 또그르르 말린 장미꽃이 이쁘다.


바늘 잡길 좋아하는 기다란 손가락을 지녔다. 들창 너머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다락방에는 헌 옷을 담아놓은 대나무 상자가 있었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상자 뚜껑을 열어 발견한 옷 중에 갈색 벨벳 옷이 너무 보드랍고 도톰해서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옷감이 어떤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옷감을 잘라서 궁리 끝에 노란 지퍼를 단 필통을 만들었다. 엉성한 바느질 그 필통은 20년 넘게 생존하며 쓰임새를 다하였다. 나는 주삿바늘 잘 놓는 엑셀런트 간호사였다. 요즘도 가끔 손가락이 심심하면 바늘귀에 실을 걸어 광목천을 한 땀 한 땀 누빈 바지를 즐겨 입는다. 


여자들의 변신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 무죄라는데 나란 여잔 머리를 지지고 볶는 일에 무관심하다. 미장원에 가는 날은 일 년에 두 번? 지난해에는 한 번 가고 말았다. 올해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부한 곱슬머리가 습기를 먹는 여름철 질끈 묶는 것을 제외하면 내리 단발이다. 앞머리 옆머리는 셀프 컷, 뒷머리는 고등학생 딸아이에게 맡기면 쓱싹쓱싹 일자로 잘 잘라준다.    

  

이상 열거한 것만 보아도 멋쟁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 같은데 대충 입고 나가도 멋있다는 소리 가끔 듣는다. 값비싼 옷을 걸쳐서 화려하게 꾸민 적 없지만 내 이미지와 단순한 옷차림이 잘 어울려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액세서리는 일절 착용하지 않는다. (내킬 때 아주 가끔 한다)  무엇을 덧붙이고 끼고 걸고 출렁이는 것들이 번거롭다.    

  

손으로 창작하는 취미가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시중에 시판된 적 없는 독보적인 의류 아이템이었다. 손으로 여러 번 디자인 도안을 그려서 특허청 디자인 심사과에 의뢰했다. 몇 번의 보완 끝에 특허청 디자인 등록증이 나왔다. 이걸 가지고 사업을 해보고자 로고를 직접 그린 상표 등록까지 마쳤다. 두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의류업의 각축전을 앞두고 그만 자신이 없어졌다.     

 

한때는 의료인으로 살다 종이와 펜으로 시 나부랭이나 끄적거리는 사람이 갑자기 무슨 수완을 발휘하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단 말인가. 당장 큰 가방 메고 동대문시장에 원단 떼러 다닐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 번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기 살기로 업자로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고즈넉한 전원생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내 팔자에 무슨’ 아깝지만 모든 구상을 접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는 정적인 사람이다. 어떤 프레임에 자신을 규정짓는 것이 편안한 중년에 이르렀다.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셔츠가 미몽인 듯 하늘거리는 날에 핑크 블랙 로퍼 두 켤레, 운동화 한 켤레를 번갈아 신으면서 챙모자를 쓰고 한가로이 산책 다니는 지금이 좋다. 하루 24시간, 구멍이 숭숭 뚫린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며 느리게, 느리게 살고 싶다. 가끔 생각한다. 언제까지 청바지를 입고 다닐 것인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고 다닐 것이다. 이십 대에 입었던 카키색 재킷이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는 걸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엽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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