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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Dec 10. 2021

관념이란, 모래바람


내 마음이 깃대라면, 하루에 수없이 지나가는 생각들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다. 깃발은 형체를 바꿔가며 자유롭게 펄럭이지만 근본적으로 깃대를 벗어날 수 없다. 깃대를 벗어나 날개를 잃어버린 깃발은 어딘가에 처박힐 쓰레기에 불과하다. 


의미 없이 스쳐 지나는 생각이 있고, 머릿속에 자리를 틀어잡고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줄곧 맴도는 생각은 걱정거리이거나 성취하고 싶은 욕망에 뿌리를 둔다. 걱정거리는 해결되면 즉각 사라지는 반면 욕망은 집요한 나머지 눌어붙은 껌딱지처럼 쉽사리 떠나질 않는다.


그런 욕망이 들끓는 청년기에는 얼굴에 여드름 올라오듯 고민거리 잡다한 번민들이 비구름 지나가듯 끊임없이 생성된다. 한 생각은 고리가 달려있다. 한 생각이 제어되기도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문 사슬들이 결박하여 숨통을 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세상사에 대한 정리정돈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인간관계,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홀가분해진다.

아직 가벼운 바람을 타지 못 한다면 돌멩이들이 굴러다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 청산하고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린아이는 단순하다. 배부르고 안전하면 방긋방긋 웃는다. 애정을 충분히 받은 애착 관계가 잘 형성된 아이들의 경우에 한정되지만 말이다. 이 필요충분조건에 결핍이 생기면 그들도 즉각 반응한다. 울고 떼쓰고 성정이 삐뚤어지기 시작한다. 


유아기적 단순성에 주목해보자. 흙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교실에 꼼짝 못 하게 가둬놓고 재능 말살 획일적 교육이 시작된다. 인간의 두뇌에 교육이라는 억압의 틀이 가해지는 학령기, 말랑말랑했던 아이들의 뇌세포가 서서히 굳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경화증에 이른다. 편을 가르는 판막이 생기고 돈 명성으로 출세하려는 편협함이 생기고 호리병 입구처럼 대학 문을 조여놓고 서로 경쟁을 시키는 비인간적 교육을 의무교육이라며 신성시 절대시 한다.


흐르는 강물도 인위적으로 비좁은 수문을 만들어서 관통하게 하면 물살이 드세지고 낙폭에 의해 물방울이 튕겨 산화한다. 상처 받는 아이들이 그만큼 많아진다. 책 10권 읽히는 것보다 숲 속에 풀어놓고 자연을 배우게 하는 몇 시간 경험이 더 행복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티 없이 맑게 만들어준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추억의 등불이 되어 노년의 끝자락까지 훤히 밝혀주는 힘이 되어준다.


교실에 갇혀 수업받던 그 기나긴 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소풍 가서 보물찾기, 운동회 때 달리기하다 넘어진 기억, 풍금 멜로디에 맞춰 부르던 동요는 잊히지 않는 한 장의 그림이 되어 장기기억 저장창고에 걸려있다. 

교육은 관념의 거대 프레임을 차례차례 순서대로 씌우는 것이다. 

관념(觀念)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골치 아프다.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 또는 지성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표상 상념 개념 의식내용을 관념이라 한다.

관념은 쓰레기통에 들어왔다 나가는 쓰레기라고 하면 너무 과잉반응일까. 쓰레기통에 찬 쓰레기는 비워야 새로 채울 수 있다. 쓰레기통이 무례하게 들린다면 그릇이라 정정하겠다. 어차피 채우는 통의 의미이니까.


그릇에 물이 흘러넘치기 전 따르는 동작을 멈추듯이… 계속 따르면 넘쳐흘러서 더 이상 담을 수 없다. 적당히 담아서 마시고 비워지면 다시 부어서 쓸 일이다. 관념을 욱여넣어 봐야 넘치면 못쓴다. 정의를 마친 관념은 죽은 사념이다.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하다. 버려야 산다. 이 껍질 저 껍질 내 것처럼 덮어쓴 채 지식인 행세를 한다고 해서 교양이 철철 넘치겠나. 어울리지 않는 큰 옷을 입은 거와 마찬가지로 어색해 보인다.


행세하지 않고 진정성 있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나 이렇게 살아요!’ 솔직한 모습이 보기에 좋다.

관념보다 행동이 먼저다. 관념보다 웃음이 끗발 있다. 관념보다 따사로운 형용사, 동사가 더 보약이 된다. 책 속에 죽어있는 생각 찌꺼기보다 지금 당장 환히 비쳐 드는 햇살이 더 영양가 있다.

불후의 걸작을 만든 예술가들의 영감도 정원 산책에서 비롯되었다.


거북목 파리한 얼굴색 심리학을 전공한 지식인보다 시골 장터 나물 파는 할머니가 툭 던지는 인생에 대한 명쾌한 지침 한마디, 유쾌한 근육질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크가 시크한 까닭은 꾸미지 않은 즉흥적이고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함에 해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못 가 봤고 그 머리는 오염된 일이 없다. 그는 온갖 것을 다 경험했다. 그의 마음은 열려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도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그는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어서 겨냥을 잘못한다는 일이 오히려 드물다. 아프리카 야만인들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고 뱀을 숭배한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란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비어 있을 뿐이다.’      - < 그리스人 조르바 >         


   

삶에는 휘장 날리는 가식이 필요치 않다. 흙을 파내는 호미와 삽을 기꺼이 부여잡는 것이요, 시퍼런 물결 속으로 뱃머리를 들이미는 것이요, 뜨거운 국밥 한 그릇 말아서 떠먹는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이다. 세련되게 잘 가다듬은 문장으로 당신의 마음을 대신하지 말라. 


아픈 이에게 다가가서 아픈 데 만져주는 약손이 되어줄 것. 배고픈 이에게 따끈따끈 흰쌀밥 지어서 내밀어 줄 것. 긴긴 겨울 허전하게 지내시는 부모님께 안흥찐빵 택배로 보내드리기. 행복은 색깔 선명하고 속 시원하고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청년기에는 관념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한 사람의 유한한 시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시간을 현인들의 지혜를 통해 세상의 코드를 배운다. 밤새워 마주친 새벽 별의 고독한 여정을 함께 하는 열정, 지성의 예리한 날에 베여 각을 세우는 눈빛, 비에 젖은 장미와 릴케의 시간이 지나가게끔,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고 저지대 안개 강을 굽어보며 자존과 겸허를 수용하는 자세, 눈물 젖은 편지를 쓰고 지우면서 관념의 쓰디쓴 독배를 마시게 하라. 


초록색 독한 술 압생트를 마시고 자신의 귀를 자르고 끝내 까마귀 나는 밀밭 죽음의 함몰로 걸어 들어간 고흐의 치열함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극한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못난 그림들과 이젤 물감이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씌웠지만 자존감을 팔지 않았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단순함이 이토록 버거울 줄이야. 손으로 그림 그려 못 파는 화가나 머리로 그림 그려 시집 못 파는 시인이나 같은 신세이다. 관념을 뜨거운 수증기로 삶고 기름으로 튀기고 고추장 간장 들기름 넣어 볶아내면 입맛에 맞는 생활의 밑천이 되려나? 


최근 들어 관계를 단순화시켰다. 원래 단순한데 들뜬 굳기름을 더 걷어냈다. 

불협화음이 사라져서 너무 평안하다. 다중인격의 탈을 쓴 독설을 차단하였다. 속세에 살면서도 깊은 산중에 사는 수도승들이 얼마나 맑은 심정으로 살아가는지 알 것 같다. 


24시간 속에는 물 산소 빛 어둠 밥 커피 일 관심 잠 꿈 음악 목소리가 들어있다. 목소리 선택권을 골라서 틀자. 음악도 녹음 음악 계속 듣다 보면 지겨워져 꺼버리듯 쓸데없는 목소리를 멀리하면 마음이 평화롭다.

잡념 스위치를 꺼버리는 명상의 연장선이 된다. 어디 방석 깔고 앉아야만 명상인가. 어떤 동작을 하든 그 동작과 행위에 몰입하여 딴생각이 끼어들지 않는 상태, 생활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사람일수록 위선자일 가능성이 높다. 경전 말씀은 기도처에서나 꺼내 들고,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술에 자신을 겹겹이 포장하고 변명한다. 즉시 들으면 그럴 듯한데 돌아서면 속이 울렁거리고 가식적인 말을 하는 그 사람의 눈동자는 혼탁하다. 진심이 안 통한다.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비언어적 태도가 신뢰를 보증한다. 


혹독한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자신의 바디 이미지가 망가져도 혹을 떼지 않는다. 보기 싫은 지방을 무덤처럼 등에 묻고 기다란 속눈썹으로 모래 태풍을 막아가며 한 발 두 발 모래밭을 건너간다. 혹을 뗀 낙타가 낙타가 아니듯 복부지방이 미어져 나오고 주름이 늘어가고 모발이 까슬해져 초라해지는 외모, 사막을 건너는 당신의 혹임을 잊지 말자. 언제라도 두 눈을 흐리게 하는 모래바람을 찬미하느니 선인장 가시가 낫다. 피하면 되고 저도 살아남느라 그리됐으니. 소설 드라마로 사랑을 염탐하고 배우느니 깨지고 부서지고 실연하더라도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아파함이 실존의 진정성을 누리게 함이니.


김장을 버무리던 손과 발이 형이하학이라면 글을 쓰는 눈과 머리는 형이상학을 좇는다. 

관념의 지성을 좇던 관념주의자였던 내가 실존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둘의 절묘한 균형점을 딛는 곡예사일지도 모르겠다. 

창가에 피는 겨울 장미 한두 송이에 자꾸 눈길이 가는, 종량제 봉투를 밟아서 부피를 확- 압축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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