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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Nov 24. 2021

겨울 채비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다른 계절에는 불필요한 채비, 월동 준비 예고편이 서두에 붙는다.

산과 들은 곳간이 탈탈 털려 텅텅 빈다. 더 내어줄 것이 없다.

각자 미리 준비하고 양식을 저장해서 겨울을 나고 견뎌야 한다.

몇십 년 전에는 연탄들이고 김장하는 두 가지를 완비해야 월동 준비가 다 된 거라고 말했다.      


요즘은 김장, 요것만 해결하면 된다.

여름 가을을 지나오면서 김치를 시중에서 여러 번 사다 먹었다.

지금까지 엄마표 김치와 내 손맛에 길든 입맛이 판매 김치 맛에 쉽사리 적응 안 된다.

첫맛은 괜찮은데 익을수록 깊은 맛이 안 난다.

늘 그래 왔듯이 김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다.     


언제 할까?

아무 계획 없이 11월 말쯤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음악 듣는 라디오에서 김장 사연이 자꾸만 들려온다.

올해는 추위가 일찍 찾아와서 서두르나 보다.

털실이 포집하여 머금은 햇살에 손가락을 얹고 싶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탕 붕어빵에 눈길이 가고, 아침 창문을 열게 하는 새소리가 유난히 맑은 진동을 전해줄 때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는 중이다.

입김이 나오는 사람들의 체온은 보온하려고 몸을 데우는 수증기이다.   

  

마침 지난 금요일에 남편이 쉰다기에 그날을 잡아서 장보기에 나섰다.

언제부턴지 마음 당기는 바로 그날 계획에 없던 일을 시도하는 걸 좋아한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당겨서 하고 싶을 때 즉흥적으로 하게 되었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보다 추동력이 있고 기분이 살아난다.

마트 네 군데를 돌면서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하였다.


새우젓 멸치액젓은 여기서, 굴 새우 무 갓 배 대파 미나리 생강 마늘은 저기서, 쪽파 청수무(동치미 담그는 작은 무)는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서 김장의 주인공 절임 배추가 보이지 않는다.      

즉흥적으로 행동할 때는 감수해야 하는 실수가 뒤따른다.

올해는 배추 작황이 좋지 않고 코로나로 외국인 노동자 급감 예약하지 않으면 물량이 없다는 것이다.

신선한 재료들을 먼저 사놓았는데 되물릴 수도 없다.


배추 5 망(15포기)을 사들였다. 낱개 한 포기를 더 샀다. 그냥 짝수로 담고 싶었다.

배추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제 절여서 헹궈서 건져서 버무리나? 시퍼렇게 퍼덕퍼덕 살아서 힘 좋은 배추를 잘 죽일 자신도 없다.     

반으로 쪼개서 칼집 넣은 32쪽 배추 산성이 순식간에 베란다에 높이 쌓아 올려졌다.

초록색으로 감싼 속이 노란 알배기는 한 송이 이쁜 배추꽃이다. 십자화과 영양 덩어리 저걸 먹으려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소금물에 푹 담갔다가 건져서 자른 단면에 소금을 왕창 뿌렸다. 커다란 비닐 속으로 차곡차곡 쟁였다.     


그렇게 두 봉지가 만들어졌다. 저걸 밤새 재워두면 된다.

김장은 양념 준비가 만만치 않다. 껍질 까고 벗기고 다듬어 씻고 물기 빼고 자르고 마늘 생강은 갈고 찹쌀풀을 쑤고 섬세한 손동작을 요구하는 재료들 특성에 맞게 손질하였다. 멸치 다시마 양파 넣은 육수를 끓이고 김장 준비를 빠짐없이 착수하였다.


다음 날 아침 피로에 찌든 나처럼 배추가 폭삭 숨이 죽었다.

죽을락 말락 배추 갗 탄성이 좀 살아있어야 하는데 소금을 너무 뿌린 것 같다.

그래도 잘 절인 배추를 보니 한 수 노하우가 생겼다. 이제 절임 배추 안 사도 되겠다.

    

갖은양념에 오미자청 청각 제피가루를 첨가한 홍해(紅海)를 만들어서 배추 흰 도화지에 크레파스를 칠하듯 쓱쓱 버무리기 시작하여 오후 세 시에 마쳤다. 김장 큰 마당을 펼친 갈무리를 모두 마쳐야 허리 제대로 편다.

일 년에 단 한 번 사용하는 대형 소쿠리 함지박 같은 큰 그릇들에 묻은 양념을 잘 씻어 헹궜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소용되는 쓰임새가 다른 것이다.

우리 마음을 담는 그릇도 마찬가지 아닐까.

종지냐, 밥그릇이냐, 함지박이냐? 따지기보다는 각자 크기에 맞게 품어서 내어줄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로써 2박 3일 우리 집 김장은 맛깔난 배추김치 네 통 무김치 한 통 온전히 김치 냉장고로 저장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남편의 물리적 힘은 필수적이다.

두건을 쓴 남편은 채소 다듬는 일에 나보다 특화된, 손이 빠르다.

김치 좋아하는 한국 여자로서 뿌듯하다.

전통에 합류하여 내 자식들에게 김장 맛을 알려주고 체험하고 물려주는 본보기를 보여주어서 더 그렇다.

중년에 접어든 한국 여자는 김장을 담글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여자가 진정 자주독립 멋있는 여성이다.

매니큐어 바른 손톱으로 김장을 얻어먹는 사람도 나름 개성적이지만 말이다.     


옷장 서랍에서 숨 고르던 머플러 장갑 스웨터를 꺼내 놓았다.

추위를 누그려 줄 유자차 생강차는 다음 주에 만들 생각이다.

아이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손난로도 한 뭉치 사다 놓았다.

발코니 화초들도 따스한 실내로 옮겨주었다.

이제 마음의 온기만 더 품으면 된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참새들은 깃털을 부비부비 호들갑 짚풀이나 검불 숲으로 찾아들 테지.

집 앞 벚나무도 남은 잎새들을 다 떨구어냈다.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나뭇가지에 번쩍이는 놋숟가락 초승달을 걸어 잠그고서 두문불출 겨울잠을 청하리라.     


함박눈이여, 올 테면 오라지.

온 세상이 흰 눈에 잠겨 미동 않는 날에, 미나리는 물가에서 새파란 꿈을 꾸고,

월동하는 냉이는 뿌리를 깊게 깊게 내리며, 부엉이는 긴긴 겨울밤 춥다고서 부엉부엉 투정 부리겠지.     

나는, 나는 긴 숨을 내쉬면서 겨울의 낭만을 노래할 것이다.


청새치 낚으러 가는 노인의 겨울 바다를 보러 갈 것이다.

동지를 지나 강철 바다를 벌겋게 데우는 태양을 영접하면서 홍익인간이 되는 꿈을 꾸리.

꽝꽝 언 겨울 호수 실금을 살펴보러 갈 것이다.

엄격한 겨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 눈가에 찾아올 봄날의 해빙을 기다리겠다.

추위를 핑계 삼아 게으름을 피우겠다.

김장 김치를 꺼내 먹으며 1.5M 목도리를 짜 보겠다.

이 겨울에.               






          

맛깔난 상차림은 아주 수고로운 손길을 요구합니다. 수육 삶을 때 된장 춘장 껍질 붙은 양파 레몬청을 넣었더니 냄새 잡히고 윤기 도는 캐러멜 색이 나옵니다. 겨울 채비 다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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