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_ 박중기

by 남연우

_ 박중기



여분의 빈 곳

반쯤은 붙고, 반쯤은 떨어져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한시적 기억을 담은 포스트잇


손길 닿는 곳에 있어

언제든 즉각적 소멸의 대상으로

가벼운 접착의 생을 보내다

기억이 소실되면 버려지는 포스트잇


나무의 몸으로 태어나

기억을 먹고 살긴 마찬가지지만

강한 접착력을 갖지도 못하고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이

순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포스트잇


늦은 밤, 문자가 온다

‘재계약은 없습니다’





- 2021년 <시와소금> 겨울호 수록



post-it-g2e4ad3399_1920.jpg by Pixabay





최근 <시와소금> 겨울호를 읽다가 눈에 띄는 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소재도 상큼하고, 시를 전개하는 과정 또한 경쾌합니다.

시가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시대에 살아가면서

온갖 난해한 은유들이 넘쳐나는 시로 인해

불통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주관적 자의식이 강한 시,

화장발이 두꺼운 시,

자연미가 없는 시,

언어도단이 심한 시,

무슨 소릴 하는지 알 수 없는 시,

어떤 시인은 이를 두고 자폐적 언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머리 아픈 시를 누가 거들떠보나요?

저부터도 안 봅니다.


손쉬운 언어, 속이 내비치는 투명한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뜻이 깊은 시를 추구하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미가 있는 시라고 생각해요.

읽으면서 바로바로 이해가 되면서

깔깔하게 의미가 맺히는

뒷맛이 개운한 시.


누구나 사용하는 포스트잇을

시의 소재로 착안한 기발한 시입니다.

찰떡같이 붙지도 않으면서

떨어질 듯 붙어있는 이 점이 포스트잇의 상품성이라죠.


쉽사리 뗐다, 붙였다

미련 없이 버려지는 포스트잇

요즘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절묘하게 비유합니다.

너무 깊은 관계는 부담스럽고

적당히 알 듯 모를 듯

가벼운 터치로 쉽게 만났다, 굿바이.


음식도 사람도 인스턴트

우리 모습이 바로

포스트잇!


마지막 연에 이르러

‘재계약은 없습니다’

문자 한 통

2년짜리 계약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결국 2년짜리 포스트잇이었군요!


시인 박중기 님은 현재 홍천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랍니다.

다음에도 음미할 만한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겨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