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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14. 2022

봄비 아니었다면

물에 젖은 행주도 비틀어 짜야 주르륵 물이 떨어지듯 햇빛을 비끄러맨 먹구름은 물기를 쥐어짤 의지가 약하다. 좌충우돌 부딪는 여름 하늘도 아니고 지방으로 가는 내내 흐린 날씨에 비친 산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끊임없이 이어진 산들의 능선은 아직 겨울, 비탈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들의 생기 푸른빛이 없었다면 무표정하고 암울한 속내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주차장에서부터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오른다. 녹다 만 얼음을 품은 협소한 골짜기에는 새봄 맞이 준비를 하는 오리나무들이 먼저 깨어나 기다란 자줏빛 막대종을 울린다. 예부터 거리를 식별하기 위해 5리 단위로 심었다는 오리나무는 매끈한 회백색 수피에 진득한 즙이 나오는 대롱거리는 꽃, 작고 동그란 열매들이 개성적으로 생겨 좋아하는 나무이다. 어릴 때 이 꽃들을 쪼개 병뚜껑에 담는 소꿉놀이 많이 했었다. 특유의 우디 계열 내음도 좋아한다.      


부산하게 깨어나는 숲의 소란 뒷짐 지고 가볍게 힘주어 오르는 길 달래 냉이를 파는 아낙네들 봄이 바지런한 손끝에 묻어난다. 짤그랑짤그랑 무쇠 가위 리듬 타는 가지런한 엿가락들이 행인들의 추억을 소환하더니 목공예품이 진열된 길가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산길에 펼쳐있기에는 아까운 하나하나 세밀한 손길이 스친 수제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갈 길을 재촉하면서도 개다리소반이 한눈에 들어왔다. 4층 목탑처럼 크기별 쌓아 올린 맨 꼭대기 제일 작은 소반이 앙증맞다. 찻잔을 올려두면 운치가 그만이겠다. 국내산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살랑이는 나뭇결 유려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다리도 높은음자리표 모양 율동적이다. 아저씨께 내려갈 때 들르겠다고 말했다.   

   

급경사 돌계단이 쉼 없이 이어진다. 몸은 마음을 따라간다 했던가. 마음이 향한 길에 몸이 따라와서 걷는 이 돌계단에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실었다. 아무 생각 떠오르지 않는다. 암자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에 장단이 실리면서 걸음 또한 절로 박자가 맞았다. 응원가처럼, 덜 힘들다. 거친 자연의 판석들이 디딤돌 되어주어 오를 만하다.  

    

드디어 오른 산상의 바위 부처님 옆모습을 친견한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의 비바람에도 풍화되지 않은 오뚝한 콧날 잘 생기셨다. 사진으로 보던 모습보다 더 화색이 돌고 친근하다. 화강암에 돋은 돌이끼는 검버섯 낀 노인의 모습으로 근엄하면서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자상한 인상을 지니셨다. 언젠가 만난 적 있는 어느 어르신을 닮은 것 같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서서 내 어깨에 손을 내밀어줄 듯 생기롭다. 아래 세상 굽어보시면서 지금 현재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월을 완독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지극정성 일관된 실천만이 성취를 이루는 것 아닐까. 공든 탑을 쌓아 올리는 것 외에는 어떤 기적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 오르는 길 나의 간절함이 무엇인지 깨닫고 돌아가서 실천하는 그것만이 기도에 대한 해답이다. 하산길에는 무릎이 풀려버려 간신히 손잡이를 짚어가며 내려왔다. 내려가며 들르겠다고 말했는데 셔틀버스를 타고 휙- 지나쳐버렸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개운하지 않은 이 기분. 명치에 작은 돌멩이 하나 올려둔 듯 … 왜 이럴까. 그 아저씨는 분명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면서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먼저 그곳에 들른 적 있는 지인에게 혹시 연락처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냉큼 목공예가 연락처가 뜬다. 전화드렸다. 다리가 아파서 버스 타고 지나쳤노라고, 개다리소반 사진을 크기별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사실 이 분은 고향 사람이다. 머리맡에 둘 작은 소반을 구입 택배로 받기로 하였다.      


어머, 그새 마음이 훨~ 가볍다. 고향 까마귀도 만나면 반갑다는데, 타지에서 만난 고향 사람에게 작은 약속을 지키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같은 말 한마디 실제 지키기란 어려운 일. 그 말 한마디 지키지 못해 균열이 벌어지는 관계를 심심찮게 본다.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사 줄게, 이런 말 지킬 수 없다면 거짓말이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까. “밥 한번 먹자.” 함부로 말하지 말자.     

 

열흘간 타오른 역대 최대 피해 최장 기록 내 고향 산불이 오늘로써 주불 진화를 마쳤다고 한다. 천금 같은 단비가 도와주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오죽 딱했으면 하늘이 도와주었을까. 봄비는 고요히 내린다. 소곤소곤 속삭이며 내린다. 땅에 스밀락 말락 씨앗들을 가만가만 일깨우며 쓰다듬는다. 성질 사나운 불씨는 끄고 화기를 누그리기에는 그만이다.


진초록 파노라마 우뚝 솟은 곡선들이 시커먼 형체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파릇한 잎새를 잃고 검게 그을린 소나무들이 흐르는 봄비에 참았던 눈물을 억장이 무너지듯 토해놓는다. 골짜기마다 그들의 검은 눈물이 잔인한 봄날 울분되어 흐른다. 뼈대만 앙상한 산은 죽었다. 지각을 뚫고 나온 마그마가 굳어버린 듯 큰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실어증 잿더미 . 집을 잃은 이재민들 산새들 산양들 놀란 가슴 진정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 걸까. 씨앗 꾸러미를 끌러 한 해 농사 준비하는 이들의 봄을 누가 빼앗아버린 걸까.

     

그 골짜기 울긋불긋 진달래 피어나는 봄.

참새 혓바닥 같은 새순이 지줄대는 봄.

피톤치드 솔향 마시며 솔방울 떨어진 오솔길 새록새록 걸어가는 봄.

이 가지 끝에서 저 가지 끝으로 파르르 떨리는 솔잎의 여운을 도레미파솔라시도♩♪♬ 노래하는 봄.

메아리 울리는 산자락에 엎드려 고사리 취나물을 뜯는 할매들 앞치마에 담겨오는 새봄.

손금이 투명하게 내비치는 시냇물 소리 여울져 붉은 단풍잎 혼자 나뭇잎 배 저어 가는 가을 그리고 흰 눈과 더불어 푸르게 푸르게 독야청청(獨也靑靑) 겨울 소나무.


봄 여름 가을 겨울, 고아한 에덴의 빛을 되돌려다오.

불에 달군 재앙이 순박한 산골 깊숙이, 너무 깊숙이 상처를 입혔다.

일백 년 후 다시 푸르른들 그 산속 살던 사람들 사라지고 없거늘.

화상 입은 울진의 봄은, 어디로 가야만 하나?                    






그 숲에 푸른 소나무들이 있어 언제나 그리워하고 행복했습니다. 불에 잘 견디는(?) 활엽수를 심어서 복구하겠다고 하는데 반대입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려주세요! 에버그린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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