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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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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05. 2022

마정리 집/ 김완하


첫 길/김완하



 이 세상의 첫 길은 물의 길이었을 것. 대지 위로 물이 걸어갈

때 흙의 가슴 위에 새겨진 발자국. 강으로 이어지는 물이

이 세상 최초의 길이었으리. 그 물 위로 뱃길이 놓이고

또 그 위로 하늘길이 열렸으리. 물은 이 땅에 처음 길을 연

어머니. 땅 위에 놓인 길에는 물의 길이 겹쳐 있는 것이다


 강의 흐름은 구름이 물살 다독이며 이끈다. 강은 천천히

보이는 시간. 그러나 그침 없는 모든 생의 총체. 강가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화음. 거기에 귀를 대면 더 크게 열리는

물의 심장.




지게/김완하



 헛간에 널브러져 있던 지게는 어디로 갔나. 아버지가 지고

다니던 그 지게 헛간도 사라졌다. 산 하나를 다 파 날랐던

아버지의 지게가 아닌가. 너른 들 갈아엎고 저문 들녘 쿵쿵

울리며 돌아오던 지게 아닌가. 그건 비유를 넘어 아버지의

몸통이다. 그분을 어디에 내다 버린 것인가. 평생 목숨으로

괴어 놓은 아버지 지게가 사라져 버렸다




바닥을 덮다/김완하



하루 종일 바닥을 쓸고 와


어둠에 발을 씻는다.


한참 동안 바닥을 들여다본다.


두 손으로 포근히 감싸 쥔 채,


발바닥에 깊이 머리 숙여 절한다.


발을 씻으면 실핏줄 사이로


세상의 길들이 와 닿는다.


어둠에 절였던 길도 환히 떠오르며


나의 바닥을 비춰 준다.


나는 바닥에 누워 바닥을 덮었다.




금문교/김완하



 그대를 만나기 전에도 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그대 떠올리게

했어요. 나는 그대 만나 세 번이나 놀랐지요. 처음 숱하게

들었던 명성만큼 그대 다가오지 않아 놀랐구요. 다음엔

주변을 감싸는 안개로 그대 좀체 볼 수 없어 놀랐어요.

그래서 여러 번 더 찾아간 뒤에야 그대를 조금 더 느낄 수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그대와 헤어지고 나서였어요


 1년을 그곳에 살며 그대를 여러 번 만났어도 그대의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진정한 모습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데 돌아서면

주변의 배경은 사라지고 그대만 홀로 살아나는 것이었어요.

더욱 놀라운 건 그곳을 떠나와서였지요. 그대를 감싸던

대륙의 모든 풍경은 안개 속에 묻힌 채 그대만 우뚝 솟아

보름달처럼 휘영청 떠올랐어요


 뒤돌아서야 보이는 게 있어요. 어두운 골목으로 그대 발자국

사라지고, 나 홀로 텅 빈 시간에 기대어 설 때. 홀연히

솟아오른 그대의 실루엣. 그렇게 지난 뒤에야 우리에게 밀려와

닿는 게 있지요. 눈앞에 핀 꽃잎 떨구고 봇물 밀려와 열리는

꽃의 문처럼.




눈사람/김완하



당신의 발자국 남은 거리에 눈이 날렸다


발자국 지워진 그 위로 별빛 쌓인다


살다 보면 쓸쓸한 마음 사이로도 새 길이 열리고


그 길 따라 당신과 하나가 되어 걷는다


당신은 벌써 내 안에 깊은 달빛으로 스며 있다




여행/김완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우리 몸 일부로 먼 등은

가장 가까우면서 깊은 곳. 우리 가슴 감싸는 등은 내 몸의

중심에 있으나 닿을 수 없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내가

서 있고. 내 안에 다른 나 너무 많이 숨 쉬고 있으니. 내 몸

에도 스밀 수 없는 내가 지천인 것. 일생을 쉬지 않고 100킬로미터

로 달려도 닿지 못할 곳. 나의 등은 신이 우리에게 준

오지奧地. 그건 오묘한 삶의 이법과 순리다. 그러니 낙타가

사막 위를 힘겹게 걸어도 다시 우리 속으로 돌아오듯. 그 고행으로

길 위에 우리 생도 깨우칠 수 있다.


 등을 향해 걷자. 온종일 땅을 딛고 다시 현관으로 돌아오는

발. 우리 잘 때야 비로소 바닥에 등을 대고 눕느니. 그렇게

우리 몸에는 수백 개 눈먼 내가 살고 있다.




통점/김완하



그것은

그대의 눈빛이 가닿는 곳마다

지상의 가장 슬픈 시간을 새긴다


겨울의 끝이 봄이듯,

균열의 상처에서

꽃들은 더욱더 붉다


샐비어의

꽃빛 저리도록 짙어진 까닭은

그 상처마다 어둠을 끌어당긴 흔적이다




시/김완하



 고등어 한 마리 프라이팬에 올라와 구워지기까지. 그것은

깊고 너른 바다 헤치며 등 푸른 꿈으로 성장했을 것. 한 때는

상어의 공격 피해 수초 사이로 숨었을 것. 더러 죽어간

무리 가운데 살아남았을 것이다. 어느 날 어부의 그물에

걸려 얼음 속에 묻히고. 사람들 손에 들려 불 위에 누웠으니.

궁극에 이르러 노릇노릇 익는 순간까지 불길을 받아먹는다.

익혀지며 끝내 비린 생을 비우고 지우니. 그건 파도의

흔적을 남김없이 태워 버리는 일. 그런즉, 고등어의 최종

역은 불길 속. 물을 넘어 얼음을 타고 불 속에 도착해 마침내

바닷속 기억을 깡그리 비워 내는 것. 그리고 비로소 한 편의

시로 태어나는 것이다.






김완하- 2010년, 2016년 미국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시와정신>

           편집인 겸 주간.






이 가을 초록 음영이 짙은 시집 한 권을 받았습니다.

시집 제목 <마정리 집>은 시인의 고향 마을이랍니다.

조병화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

조병화 문학관 현판에 걸린 이 글귀가 잔잔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김완하 시인님의 애향심 또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갑니다.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눈 뜨고도 못 보는

세상의 외진 데를 봅니다.

그 어둠지고 깊숙한 이면

슬픔과 고독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위대합니다.

(저는 갈 길이 멉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인생길도

그 길을 걸으며

뇌리에 꽂힌 명제도

애증도

뜨거운 불길 속에 익고 또 익어서

고행의 바다

"파도의 흔적을 남김 없이 태워 버리는 일"

"마침내 바닷속 기억을 깡그리 비워내는 것"


아, 고등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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