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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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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29. 2022

가을 정류장



가을에만 정차하는 정류장이 있습니다

웃음기를 거둔 쓸쓸한 늦가을에 닿아야 합니다

엔진이 꺼져 더는 갈 곳 없는 끄트머리 길입니다  

   

코스모스 헤실거리는 들녘을 지나

빛을 긁어모은 해바라기들이

씨앗을 밀봉하는 지평선을 지나    

 

누런 서류봉투가 암시하는

중년 사내의 무거운 발걸음이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금은방을 지나     


퀭한 아이라인 따라 짙은 그리움 그리는

거울 앞 여자의 외출을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트렌치코트를 입은 아낙

생활에 찌든 얼룩을

떨어지는 낙엽이 애써 지우며     


상모꾼의 나선형 회오리에 갇혀

헐거워진 나사를 마저 죄고

녹색 담즙을 토해내는 풀벌레 유언을

귀 기울여 듣는 길   

  

먼 계곡을 타종하는 범종 소리

멈추어 서는, 만추의 저녁  

   

홀쭉하게 늘어뜨린 그림자에게

검은 대지가 거둔 빨간 사과 한 알

물 한 잔을 먹입니다     


구독한 가을 페이지에 단풍잎 꽂아두고서

서둘러 하차한 짐을 어디에 맡기나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청동빛 하늘 실금 긋는 철새들에게

갈 길을 묻습니다           



  


            

한국민속촌 단풍나무, 가운데 별모양 열린 하늘
가끔 가는 등산로, 소나무가 걸러낸 빛의 얼개 무늬




만추에 이르면 무난히 가던 삶의 운행을 멈추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감이 맞는지,

이 길은 어디로 데려가는지?


늦가을 정류장에 도착하면

모두 내려야 합니다

거기 도착하는 여정을 최근에 본 모습으로 전개하였어요


지난해 이어 민속촌으로 갔더랬습니다

여자 셋이서 잔뜩 멋을 부려

걸어가고 있었어요

옷이며 가방 구두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한데

촌스러운 겁니다

멋을 담을 만한 개성이 없어보였죠..

그리고 생활의 찌든 때

그건 어쩔 수 없는가 봐요

자연스레 따라 붙는 걸 보면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중년 사내가 걸어갑니다

한손에 누런 서류봉투를 들고서

그 봉투가 왜 그리 무거워 보이던지

어깨가 처진 뒷모습이 말해줍디다

그리 달갑지 않은 내용임을..


다시 민속촌

풍물패들이 신명나게 놉니다

곰방대? 끝에 쉴 새 없이 접시를 뱅뱅 돌리는 접시 재롱꾼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상모꾼의 회오리 헤드뱅잉

기가 막히더이다


아직도 들려오는

까끌까끌 목이 쉬어버린 풀벌레 외침!

호소력 짙은

인간의 목소리를 능가합니다

"추운 날을 대비하라, 대비하라, 안 그럼 진짜 서럽게 된다"

뭐 이런 경고를 읊조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제 내릴 때가 되었어요

짐을 어디에 두긴 해야겠는데

아무도 없는 텅 빈 플랫폼에 혼자 남겨진 기분입니다

안개는 잔뜩 끼어 길은 오리무중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늘을 쳐다 봅니다

철새들이 날아갑니다

그들은 드넓은 하늘길을 헷갈리지 않고 무슨 영감에 이끌리듯

곧바로 나아갑니다

물어봅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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