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사람

by 남연우

요즘 아침놀이 참 곱다.

장밋빛 커튼을 살며시 열어젖혀 새 하루의 행진을 시작하는 태양에게도 하늘의 길이 있지 않을까.

늘 다니던 길만 다니란 법은 없으니까.

무한정 열린 우주를 운행하는 태양도 식상할 것이다.

고도와 각도를 틀어서 좀 삐딱하게 시선을 처리하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늘 다니던 길도 새롭게 열린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녘 하늘을 향해 커튼을 열기 전 기대하게 된다. 오늘은 어떤 색상을 입혔을지?


말갛게 어둠을 헤쳐 건너온 빛살이 창공과 대지 위로 넘쳐흘렀다.

사춘기 소녀의 얼굴에 비친 무지개 빛깔 중 첫머리 발그스름하면서 주황빛 진주조개들이 해변에 펼쳐진 풍경이 그려졌다. 잔잔히 흩어진 수제비 구름이 광채를 더했다. 창문을 열고 방충망을 밀어서 투명한 대기를 마신다. 완벽한 평화를 되찾았다. 이런 고요를 선물하려고 광란의 눈을 번득이며 태풍의 눈이 휩쓸고 지나갔던가.


이 시기 꽂힌 멜빵 치마와 모자를 쓰고 운동화 끈을 조였다.

정수리에 해를 이고 길을 나섰다.

그 옛날 똬리 틀어 물동이 인 여인처럼.

성질 급한 해가 많이 누그러졌다.

뜨겁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온순해졌다.

지난달에 봤던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슴속에 붙은 불을 그새 한강 물을 들이부어 꺼버린 걸까.

그렇다. 타오르는 열기를 스스로 가누지 못해 밤낮 괴로워하는 열병을 보았었다.

그 열풍에 풀 한 포기 시들시들한 밭작물 바짝 말라버린 저수지 밑바닥이 타들어 갔었다.

태양은 고뇌하였다. 방법은 단 하나, 바닷물을 들이붓는 것이다.

가열된 대양을 수증기로 증발시켜 대지의 젖줄이 불어나게끔 폭우를 양동이째 들이부었다.

그 자신 두꺼운 비구름에 유폐된 채 납빛 안색으로 두문불출하였다.

극단의 고행으로 열병을 다스렸다. 오대양 육대주 구경하는 낙을 포기하였다.

육지와 대양의 무너진 균형을 리뉴얼해주었다.


오늘 하루 화창한 날씨를 대동하고 출몰한 태양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정오, 난쟁이 그림자를 데리고 걷는다.

황색 얼룩무늬 충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외국인이 지나갔다. 아기를 안고 맨발로 걷는 젊은 아빠를 지나친다. 캐러멜색 그의 팔다리가 인상적이다. 지난여름 어떤 경로를 걸었을지 짐작된다. 사람들은 답답한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나도 그랬다. 맑은 공기를 여과장치 없이 직접 마셨다. 산속 옹달샘을 굳이 걸러서 마시지 않는 것처럼.


개울물이 불어서 흘러가는 소리가 바리톤 음색 쾌활하다. 우렁차다.

군데군데 길가에 운반된 모래 흔적으로 보아 비가 많이 왔었던 모양이다.

그 길 바윗돌을 끼고 고마리 꽃들이 운집하였다.

이 무렵 고향 논도랑을 가득 메운 고마리들이 피어났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꽃들이라 더 눈여겨본다.

개울가 개골짝 논골 습기가 고인 곳이라면 어디든지 스스럼없이 생태를 꾸리는 꽃들은 겹겹 층위를 디딘 방패형 초록 잎사귀를 호위 삼아 작은 연꽃들이 연상되는 모습을 띤다. 분홍색 흰색 오밀조밀 핀 꽃잎 들여다보면 챙모자 아래 머리카락 드리운 고운 얼굴이 숨어있다. 미스 고, 이름은 마리! 간직하고 싶은 도장을 새겨놓은, 고마리. 카톡 사진에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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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만난 고마리 양!


우중충 응달진 그늘 속에는 달개비들이 파란색 두 귀를 쫑긋 모은다.

파란색이어서 단 두 장의 꽃잎을 달고서도 당당하고 품위 있다.

이 꽃의 자존심은 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대나무 마디를 닮은 지조와 절개를 꼿꼿이 세워 성장을 이루었다. 시끌벅적 요란한 색으로 떠벌리지 않고 오로지 듣는 데만 집중하는 이성적인 모습이 눈길을 끈다. 명상하는 꽃이 있다면 바로 달개비 꽃이 그 품계에 해당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 꽃을 ‘꽃이 피는 대나무’라고 부르면서 수반에 키워 감상하였다고 한다.

한낱 풀꽃에 불과한 미물을 높이 평가한 그의 안목이 섬세하다.


1663817890566.jpg 무리와 동떨어져 홀로 핀 이 꽃을 칭찬합니다


뭉게구름을 포집하는 연갈색 억새도 손을 벌려 새파란 하늘에게 갈채를 보낸다.

은발로 흩어질 때 흩어지더라도 지금은 청춘, 눈이 부신 청춘을 구가한다.

청춘은 도도하고 자유롭다. 낭창낭창 흔들리며 바람을 만끽하며 순간에 몰입한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에 치중 나중을 생각 않는다.

오로지 순간에 사로잡혀 버린다. 순간이 영원이라 여긴다.

순간이 지나가면 색다른 순간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저 그런 시간과 시간 사이 끼워진 비밀 같은 미로를 헤매기도 한다.

미로를 돌아 나온 잔상은 거울에 부서진 이면이었다.

깨지든가 말든가 속든가 말든가 거울은 비춰주면 그만이다.


20220921_123614.jpg 화려하진 않지만 살색 순한 억새꽃입니다


조깅하는 사람이 달려온다.

그냥 걷기에도 가벼운 열기가 남아있는 시각 그는 내 앞에서 급 U턴 돌아서서 달려간다.

티셔츠가 흠뻑 젖었다. 내 전방 시야를 차지한 채 달려가는 그 사람 종아리 근육이 탄탄하게 움직인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절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벤치에 앉아서 허브캔디를 입에 물었다. 동생이 가져온 알펜 허브 입자가 품은 약간의 쓴맛, 은은한 단맛과 향이 퍼진다. 허기를 달래며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어떤 사람은 뒷모습에 의미를 담는다.

출근복 차림 직장인이 점심시간 짬을 내어 한가롭게 걷는다. 앞서 걷는 걸음걸이 쉼표가 툭툭 찍혔다. 왼발 오른발 사이 템포를 늦춰 흔들리듯 걷는다. 허리를 숙여 사진을 찍기도 한다. 나도 여러 번 앉아서 사진을 찍고 올라온 길이라 눈길이 간다.

나랑 같은 종류의 MBTI인가?

길게 머리를 땋은 남자 영올드가 감물 염색 개량한복 반바지를 입고서 느릿느릿 걷는다. 예사 차림새가 아니다. 도 닦다가 심심해서 나온 차림이다. 키가 작은 그분 옆을 지나칠 땐 조심스러운 바람이 일었다.

들러야 할 곳이 있어 걸음을 서둘렀다.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와서 개울길로 내려가려는데 한 사람이 걸어오다가 주춤거린다.

그 사람을 지나치려 하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우게 만들었다.

“저, 길 좀 묻겠습니다. 여기 호수가 있다는데(두 손을 모아서 둥근 호수 모양을 그리면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선글라스를 낀 낯선 사람의 눈이 길을 묻고 있었다.

난데없는 이런 질문 까마득한지라 성실히 답변해주었다.

“여기서 언덕길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내려가면 백곰 두 마리가 있어요. 거기서 우측으로 가시면 돼요.”


주차장으로 가면서 좀 전 상황이 리메이크됐다.

호수 목전에 와서 그냥 길 따라가면 되는 자연지형을 묻는 사람도 있나?

목각 이정표 친절하게 다 안내되어있는데…

(언덕 아래 서면 호수는 동산에 가려져 안 보인다.)

그 사람의 할리우드 액션에 나는 왜 속아 넘어갔을까?

내가 좀 더 나이 들어 무심하고 무뚝뚝한 여편네가 되었더라면 그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그저 손으로 가리키며 저리 가면 된다’고 고개를 주억거렸을 텐데.

친절한 미끼가 되어 내가 걸어온 길을 성실히 답변해주고 말았다.

마치 당신 어디서 온 겁니까, 이 질문에 답변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호수는 두 군데 똬리 틀어 자리잡고 있다.

언덕 갈림길도 왼편 아래 호수로 가는 길, 오른편 위쪽 호수로 가는 길로 나뉜다. 두 호수는 각각 이름도 있다.

그렇다고 두 호수로 가는 길을 일일이 설명해줄 이유도 없었다.

뭐지, 이 상황은?

에구 츳츳. 순진했다.


가는 길이 헷갈리거나 혼란스러울 때 묻고 답해주는 현자가 있다면 시름을 덜 수 있어 좋겠다.

산신령 같은 지팡이를 들어 올려 이 길로 가라고 알려준다면 지팡이 끝이 가리키는 연장선은 확실하고 안전한 지평선이 열릴 것만 같다. 그 길로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돈줄이 터지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낙원이.

내 안의 어둠 속 모든 더듬이를 총동원 지팡이를 만들어가려니까 실수하고 되돌아 나오고 넘어진다.

때론 지팡이가 부러진다.

앞서 걸어간 연장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원하는 답을 얻게 될까.

그들도 지나쳐 왔지만 인생 여전히 모르겠더라, 말한다.

성인군자들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미 다 일러주었소. 당신 안에서 찾으시오.”





20220921_132228 (1).jpg 층꽃나무, 이름처럼 층층 계단을 디뎌가며 꽃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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