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 귀성길은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 90년대 도로 사정을 방불케 했다.
용인 휴게소를 지나는데 두 시간이 걸렸고 평창까지는 다섯 시간, 고향에 당도하기까지 여덟 시간 반이 걸렸다. 오전 아홉 시 반 출발 저녁 여섯 시가 되어 도착하였다. 태백산맥을 넘어간 그 시각 동해 바닷가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감자 몇 알과 커피로 점심을 대충 때웠더니 속이 쓰리다.
짐을 내리고 부모님 일을 내 일같이 돌봐주시는 이웃집 황 씨 아저씨께 먼저 가보았다.
마당에는 외지 사는 자식들이 몰고 온 차 세 대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아저씨네 집은 시골집을 리모델링 자그마한데 그 집 언덕에는 갖은 꽃들이 철 따라 피어있어 갈 때마다 눈길을 끈다.
흙으로 뒤덮인 이전 모습이 좋았었다. 지금은 언덕배기 윗집이 펜션으로 지어지면서 콘크리트 돌벽이 언덕을 떠받치고 있었다. 아저씨는 손재주가 좋아서 돌 틈 사이사이 꽃씨를 뿌렸다. 이 계절에는 아름드리 취꽃이 절벽에 피어있었다. 하늘 아래 수직으로 살길을 도모한 꽃들이 페르시아 공중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건너 당나무 곁으로 가보았다. 황금빛으로 이울기 시작하는 들녘 너머 바다 위로 미색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바닷물에 씻겨 말갛게 물기 묻은 얼굴, 아무런 고뇌 없이 청순미를 간직한 얼굴이어서 더 빛난다.
황금달도 좋지만 미색 달님이 더 어여쁘다. 밤새워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난 뒤 맞이하는 새벽에 홀로 거닐면서 사색에 잠긴 그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겨워한다.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그의 시간, 어둑한 여명이 어떤 이상으로 빛나는 그의 푸른 이마를 스쳐지나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 포착한 얼굴이 저런 모습 아닐까.
어디서 본 듯한 인상 같다.
추석날에는 구름이 껴서 저 눈부신 광채 못 볼지도 모른다.
두 손을 모아 기도드렸다.
당나무 가지 사이로 쏙 들어온 보름달이 세상 하나뿐인 나의 달님이 되어주었다.
다음날 시집 성묘를 마치자마자 민첩하게 컴백 늦더위 습기가 후텁지근 남아있는 고향 들길을 따라 걸었다.
베이지색 억새가 바람에 나부낀다. 늘 그 자리에 서서 가을손을 흔든다.
부드러운 촉감 쓸어보고 품에 가벼이 안아본다.
언제부턴지 가을 들길에 내려서면 얘를 꼭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 찍고 반가워하며 지나간다. 나의 들판 친구 억새는 그간 키가 많이 자랐다. 몇 해 지나면 나보다 키가 더 높이 자랄 것이다. 천변 비탈에 비스듬히 서서 자손도 번성하는 그 모습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야겠다.
방파제에 나가 보니 파도가 잠잠하다. 돌숲 무성한 한재 바닷가에 흰 파도가 가끔 부서진다.
해안 경비대 관측소가 더 높아진 것 말고는 언제나 똑같다.
그 바다가 그 바다, 마음을 놓는다. 고향은 변함없이 푸르르다.
바다가 그렇고 산이 그렇다. 겨울에 다가서나 여름에 다가서나 한결같은 그 모습이다.
고향이 바뀌었다면 바뀐 모습으로 찾아간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게다. 달라진 내 눈에 고향산천이 달라져 보이겠지. 그 산과 바다가 푸르듯이 아직 내 모습 또한 변함없이 푸르다. 소중한 걸 소중하게 간직하는 마음이 그렇고 부모님이 곁에 생존해 계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척 언니를 만났다. 산소에 들렀다가 길에 막 내려서는 참이었다고 한다.
진짜 오랜만이다. 언니가 시집가기 전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삼십 년이 훨씬 넘었다. 아주 어릴 적에 언니가 밤을 줍는다고 이 무렵 새벽 비추던 후레쉬(플래시) 불빛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육십 대 중반 친척 언니는 허리가 불편한지 복대를 하고 있었고 등허리가 살짝 굽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지금은 폐가가 된 고향 집을 돌아보고 버스를 타고 돌아갈 거라는 그 언니 뒷모습을 보면서 허물어질지언정 자신의 옛집을 두 눈에 담아감으로써 안심이 되는 한 줄기 따스한 위안을 본다.
고향은 그런 것이다.
어릴 적 두 눈에 담긴 그 모습을 복원해 내려는 처절한 눈빛이 애향심이요, 지고지순한 가치요, 퇴색되는 가속도가 붙는 시간에 대한 복수요, 바다 기슭 굳건히 버틴 돌에 버금가는 존재의 이유이다.
그 바다가 그 바다, 그 바닷물 한 줌 떠서 가슴에 넣어둔다. 다음 찾아올 때까지 내가 숨 쉬는 생명수요, 소금이요, 방부제요, 푸름이다. 추석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뒤로하고 대관령을 넘어서 올 때 흔들리는 들꽃 속에 부모님 얼굴이 보였다.
친정에서 하룻밤 못 자고 고개 넘어가는 이 자식 마음은 내내 무겁습니다. 다음 명절에는 친정에서 부모님 명절 음식 해드리겠습니다. 곧 건조하고 차가운 북풍이 내려옵니다. 겨울에 찾아뵙겠습니다.
“엄마, 아버지.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