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좌회전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떤 보행인에게 시선이 꽂혔다. 느티나무 가로수들이 도로 양쪽에서 우아하게 런웨이 워킹 하는 이때 트렌치코트를 입은 날씬한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길을 다 건넌 그녀가 우측으로 돌아서는데 알이 작은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을 보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인데 선글라스는 다 뭐람. 동그랑땡 선글라스도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연세가 제법 든 분인 것 같다.
누군가의 냉정한 평가와는 달리 그 차림새를 갖추기 위하여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서성거렸을 그분의 기분만큼은 가을을 제대로 탔음이 분명하다. 가을 멋의 대명사인 트렌치코트, 일 년 열두 달 옷장에 무게 잡고 걸려있는 그 옷을 한 번은 입어 줘야 되는데 날씨 눈치만 본다.
낮 기온이 20℃ 가까이 오르는 요즘 날씨는 입기에 애매하다. 입자니 덥고, 때를 못 맞추는 둔감쟁이로 보일 것 같다. 찬 바람이 불면 입어야지 기다리다 보면 기온이 뚝 떨어져서 패딩에 밀리기 일쑤다.
시베리아 기단 북풍이 내려와서 거리의 낙엽들을 일제히 훑어버리는 바로 그날 깃을 세운 트렌치코트를 입은 누군가의 뒷모습은 중후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날씨와 딱 어울리는 멋쟁이가 된다.
새들도 멋쟁이가 따로 있다. 최근 천연기념물 원앙들이 겨울을 나려고 호수에 찾아든 모습이 목격되었다. 귀여운 새끼들을 거느린 일가족 여러 무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무가 우거진 기슭 아래 호수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서 헤엄쳐 다닌다.
빨갛고 노랗게 색칠하고 다니는 사람은 여자인데 원앙은 다르다. 암컷은 회색 깃털 볼품없는데 수컷들이 요란하게 치장하고 다닌다. 보라색 붉은색 청록색이 그라데이션 된 댕기를 늘어뜨리고 흰색 눈 둘레, 턱에서 목에 이르는 코랄색 깃털, 붉은 가슴, 노란 옆구리에 선명한 오렌지색 날개 깃털을 장착한 겉치장을 한다.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단장한 수컷의 목적은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봐도 예쁜데 새들 눈에는 얼마나 곱게 잘 보일까. 조류의 망막 세포는 사람보다 열 배 많아서 색깔과 세밀한 부분까지 잘 감지한다고 한다. 소리뿐만 아니라 시각적 신호도 새들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초라한 깃털에 색을 입힐 선택권이 없는 암컷 원앙은 화려한 깃털을 가진 수컷을 좋아한다. 이렇게 만난 두 원앙새가 평생을 해로하냐면 그렇지 않다. 원앙금침이 상징하는 원앙의 실제 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일부다처제 수컷 원앙이 가부장 역할을 할 것 같지만 배우자 선택권은 개체수가 훨씬 많은 암컷에게 있다. 선택받은 수컷이 그 암컷 주위에 찰싹 달라붙어 다른 수컷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졸졸 따라다녀 다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원앙새 새끼들의 DNA를 검사해 봤더니 약 40%는 현재 아비와 다른 유전자가 나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깃털 빛깔이 윤기 나고 아름다운 수컷을 선택 우수한 종족 보존을 하기 위함이라는데 실제로 우수한 수컷의 유전자를 획득한 새끼들의 생존율이 더 높다고 한다.
신혼부부에게 선물하는 금슬 좋은 부부의 상징물이 제대로 배신 때렸다.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는 새들의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일부일처 기러기는 한 번 맺은 짝과 끝까지 살아간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따라 옮겨 다니는 철새이다 보니 동고동락하면서 동지로서의 의리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고생을 함께 한 인생의 동반자는 의리라는 게 있다.
가을과 함께 호젓한 호수에 찾아온 멸종위기종 원앙들의 사생활을 참견하고 싶지 않다. 내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다. 한국도 저출산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기후위기가 환경재앙으로 이어지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반증 아닐까. 이상 기후로 사과 생산량이 급감한 올해 사과 한 봉지 가격은 손을 들었다 놨다 하게 만든다.
사람도 동물이다. 개체수를 줄여서라도 적자생존하려는 자연의 법칙을 따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는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결부되어 있다. 비효율적인 고비용 교육비, 고학력 청년 실업, 높은 주거비, 가부장 문화가 그것이다.
일 년에 두 번 찾아오는 명절 연휴는 시댁 중심 고착화되어 있다. 결혼한 그 순간부터 명절은 여자에게 불리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법으로 보장하는 황금연휴 푹 쉬고 싶은데 행복지수는 형편없이 낮다. 전통적인 이 구조를 저항 없이 순리대로 이십 년 이상 지내보니 답답하고 숨 막힌다. 의례히 찾아오는 이 명절이 즐겁지 아니하다.
해마다 똑같은 시공간으로 차량이 쏟아져 나오고, 올해는 여덟 시간 반 차에 갇혀 꽉 막힌 귀향길, 피곤에 지쳐 불편한 잠, 똑같은 명절 음식, 똑같은 제사, 뒷설거지, 차 막히는 귀경길 되풀이, 무엇이 즐거운 명절인가. 듣는 음악도 몇 번 반복하면 싫증 나는데 체력 소모되는 리플레이 신물 난다.
시간과 에너지 낭비, 인생의 낙을 위해서라도 비합리적 전통문화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이 땅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불합리한 삶의 구조를 MZ 세대 여성들이 결혼 파업, 출산 파업으로 자신의 행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도래했을 뿐이다.
아흔 되신 친정 부모님을 두고 시집 제사 지내러 가는 나는 착한 며느리 매정한 딸이다. 죽은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보다 산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먼저 아닌가? 다음 설 명절에는 나쁜 며느리 착한 딸이 되기로 했다. 친정에 남아서 부모님 맛있는 명절 음식 내 손으로 꼭 만들어드릴 것을 굳게 맹세한다.
고인 위주로 돌아가는 명절 말고, 산 사람이 행복한 명절 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뒤늦게 서서히 바뀐다고 하더라도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인구수가 줄어든 인류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지구차원, 우주차원으로 확장될 것이다. 국경은 무의미해지고 머지않아 다가오는 AI 시대 인류는 생존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인 장으로 넘어가는 인류세, 인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호수에 찾아온 원앙새 무리 반갑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