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Apr 20. 2023

백 번 설계된 봄

사월 중순 초여름 더위가 엄습한 산속은 한여름이다. 어느새 자라난 녹음이 우거져 빛을 걸러낸 그늘이 어둑하니 드리워져 있다.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 허리에 묶고 걸어도 열이 치받는다. 올해 들어 처음 찾아온 산길에는 생장하는 숲이 내뿜는 체취로 가득하다. 


활엽수들이 손바닥만 한 잎사귀를 키워서 싱그러운 녹색 내음이 나는가 하면 이제 막 꽃이 떨어져서 시드는 잔향, 몸통을 키우느라 나무껍질이 벌어지는 비릿한 내음, 어딘가에 숨은 알 수 없는 꽃향기… 몇 년간 마스크에 가려져 통 맡지 못했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내 몸 세포에도 엽록소가 들어있지 않을까. 음, 상큼하고 상쾌하다. 


올해 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것 같다. 기다린 만큼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데 하루가 다르게 휙휙 지나간다. 누가 등 떠밀어 쫓기기라도 하는 걸까. 늘 제 자리 꿈쩍 않는 식탁 다리에 달아나지 못하게 묶어둘 수만 있다면 행복지수가 쑥쑥 올라갈 텐데.


빠르게 흘러가는 이 봄을 묶어두려는 내 손이 바쁘다. 선물 들어온 나물들은 왜 그리 많은지 온통 나물 보따리들이 주렁주렁 냉장고에 자리 차지하였다. 마음 같아선 재래시장 어귀에 좌판을 깔고 앉아서 팔고 싶다. 풍진 세월의 주름도, 흙냄새도 안 풍기는 도시 여자가 파는 나물을 누가 거들떠보려나. 


되는대로 펄펄 끓는 냄비에 천일염 한 숟갈을 푹 떠넣고 참두릅 개두릅을 삶아냈다. 곰취랑 달래는 간장 장아찌 담고 명이나물은 김치를 담갔다. 처음 만들어본 명이나물 김치는 풋내 나면 어쩌나 기대 반 기우 반. 그런데 웬걸, 잎이 널따란 부추김치 맛이 난다. 양념이 진한 산마늘 겉절이에 자꾸만 젓가락이 간다. 


해쑥은 두 뭉치로 나누어 한 뭉치는 파랗게 데쳐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생쑥을 갈아서 초록색 밀가루 반죽을 떼 내어 수제비를 끓였더니 그릇에 담은 색감도 좋고 쫄깃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장마철에 얼린 쑥을 해동 들깻가루 듬뿍 넣고 쑥수제비를 끓여서 묵은지를 곁들여 먹으면 습기 먹어 무거운 몸이 개운해진다. 


남은 한 뭉치는 웍에 덖어서 볕에 말리었다. 어떤 이는 구증구포 한다는데 연한 섬유질 아홉 번이나 푹푹 찌고 말릴 필요를 못 느꼈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은은한 쑥향이 감도는 손길에 쑥차 장인이 된 듯하다. 

이런 분주한 손길을 거쳐 봄이 저장되고 내 몸속으로 들어와서 활기를 띤다. 봄이 내어주는 잠시 잠깐 때를 놓치면 식용 가능한 나물은 거칠어져 독성이 오르고 못 먹게 된다. 경작 시기를 놓치면 풍성한 결실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편 많이 얻으려고 쉴 틈 없이 일만 하다 찬바람 불면 꽃보다 고운 모습 아껴주고 사랑하지도 못한 채 껍데기가 늙은 손안에 금은보화 그득한들 무슨 소용이랴. 시간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노화와 맞물려서 더욱 서글프다. 


꽃이 핀 지금 이대로 향기를 맡고 들길을 걷고 웃음 지으며 행복한 생존을 최고 웰빙이라 정의하고 싶다. 물아일체가 되어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 생활의 모든 수단이 가동되어도 무방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썰고 포만감에 겨워하며 와이드 브라운관으로 OTT를 시청하는 행복은 하위 순위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나무에 달린 꽃은 져도 사람은 마음속으로 언제든지 꽃피울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만 들어있으면 향기로운 웃음꽃 피어난다. 미움 시기 질투 우울 불안 분노 탐욕 같은 독소를 빼면 비 갠 하늘가에 무지개를 띄운다.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 하나 슬쩍 잡아당겨 내 눈가에 걸친들 누가 뭐랄 사람 없다.


봄이 귀한 건 백 번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백 번 이상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덧 쉰 번을 갓 넘긴 봄이 내게서 지나갔다. 남은 계절에도 꽃은 핀다. 그 꽃들이 봄을 간직하고 있어서 다행이라 여긴다. 


만약 내 나이가 아흔이 넘어 다섯 손가락에 꼽는 봄이 남아있다면 어떤 심정일까. 그때가 되면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적셔줄 눈물도 말라서 가슴으로 메마른 울음을 울 것이다. 수선화 가득 피어난 정원에 앉아서 얼그레이 한 잔을 마시며 잘 살아왔노라,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지난해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관 위에는 생전 여왕이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벨모럴성 영지 내의 꽃들이 놓여있었다. 사랑받은 그 꽃들이 여왕의 안식을 인도해 주었으리라. 한 세기를 풍미한 여왕의 성품이 얼마나 온화하고 소박한지 마지막 길에 이르러 알 수 있었다. 


신은 백 번의 봄을 내게 주었다. 어느 봄이 가장 아름다웠냐고 묻는다면 어릴 때 눈에 넣은 봄이 가장 아름다웠다. 총천연색 아무런 굴절 없이 순진한 눈동자에 담긴 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봄을 보려고 지구별에 태어난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어 키가 작아지는 것도 땅 가까이 내려가려는 자연스러운 노쇠 현상 아닐까. 

이 봄이 지나고 나면 계절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다음 약속을 굳게 믿듯이 순리에 따르면 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차면 기우는 생멸에 인간의 사소한 감정을 얹지 말자. 지구별이 운항하는 이 흐름에 맡겨놓자. 데려오고 데려가는 우주의 숨결에 큰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저녁상에 내려고 꽃봉오리 다문 유채나물을 다듬었다. 몇 포기를 남겨서 유리컵에 꽂아두었더니 한 시간이 지나자 꽃봉오리가 열리면서 노란 꽃이 피어났다. 냉장고에서 열흘 이상 방치되어 시들시들한 상태였음에도 물을 만나자 살아있는 꽃이 된다. 식탁에서 시시각각 피어나는 유채꽃을 감상하며 함께 저녁을 먹던 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꺾기 창법이 돋보이는 팝송 트로트 ‘crazy love’를 따라 부른다. “미이~이친~ 사아랑~” “미이~쳐었다~ 내 사아랑아~” 입에 들어간 밥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데쳐질 뻔했던 유채나물이 꽃을 피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싹의 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