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지나고도 맹렬한 폭염에 대한 내 생존 반응은 전기료 폭탄 그리고 수돗물 사용량 폭증이다.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물학적 비용인 셈인데 정신적 생존 반응은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그냥 지쳐서 멍때리는 경우가 많다.
텃밭을 내팽개친 지는 벌써 두어 달 다 돼간다. 발길을 끊었다. 숨만 쉬어도 힘든데 땀 흘리는 노동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잡초가 우거지거나 말거나 나는 모른다. 바로 옆 텃밭으로 슬며시 넘어간 고구마 줄기를 보다 못한 옆 밭주인이 갈 길 제대로 인도하듯 우리 밭으로 밀쳐내었다. 찬바람이 불면 그때 가서 돌볼 생각이다.
이번 여름은 방콕을 면치 못했다. 시원한 고향 바닷물이 쏴르락 철썩 유혹해도 지난 사진첩을 들추면서 대리만족하였다. 아이들 튜브 태우면서 일급수 물방울을 튕기던 백담계곡, 불영계곡의 여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시간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에어컨 바람 선풍기 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진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끝날 때가 다 됐는데 끝나지 않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지루한 인내심을 키운다. 인내심이 자라고 자라면 울타리를 휘감은 나팔꽃이라도 피우게 되지 않을까.
과연 이 뜨거운 여름 광선을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는 나와는 달리 극렬하게 반응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퍼뜩 연꽃이 떠오른다. 연꽃과 수련은 여름이 되어야 화들짝 피우는 꽃들이다. 푹푹 찌고 삶는 여름이 여름다울 때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다.
그들의 생존 반응을 살피러 ‘바다의 협주곡’(Jean Claude Borelly 연주)을 들으며 세 시간짜리 여름휴가를 떠난다. 작렬하는 태양을 양산 위에 떠받치며 둑길을 걸어가니 너울거리는 연잎 파도가 밀려온다. 거침없이 일렁이는 물결 위에 태워야 할 연분홍 꽃송이들이 안 보인다.
이미 다 져버렸다. 파도가 너무 깊어서 빠져버린 모양이다. 타원형 연잎 그늘에 숨은 물닭들 꾸욱꾸욱 애먼 소리뿐. 애써 키운 꽃들을 떨군 연잎들은 연자육이 익는 시간을 기다린다. 누구 양산이 더 높은지 초록색 키를 키우면서…
수련도 한차례 지고 나서 두 번째 꽃봉오리들을 일제히 내밀었다. 어느 인솔자의 지시를 받는 건지 모두 뾰로통한 봉오리들을 다물고 있다. 단 몇 송이 아웃사이더는 없는 거니? 예외를 허용치 않는 수련들의 집단주의 완벽주의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고 만다. 왜 한 송이라도 널따란 이파리에 숨어서 피워줄 수 있는 거잖아. 왜 모두 눈치만 보는 거냐고?
알겠다, 알겠어. 너희들은 수생 식물이잖아. 내가 바라보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 네 뿌리는 질척거리는 물속에 잠겨있어. 지금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거 다 알아. 들숨 날숨 또한 박자를 맞추어 리듬을 타고 있지. 그러니까 예외가 없는 거야.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운명공동체인 거지.
물속 뿌리들은 서로 얽혀 있어. 기포들을 뽀글뽀글 내보내며 숨결도 공유하는 사이라서 한꺼번에 피고 한꺼번에 시들어. 물은 의좋은 하모니를 원해. 그들의 고요하고 잔잔하며 치열한 생존을 물끄러미 수긍한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을 맥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무슨 보상이라도 해주려는지 저쪽 물가에 울긋불긋한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붉은 불꽃이 물 위에 붙어서 활활 타오른다. 물속에 심지를 박고 꺼질 줄 모르는 꽃불 이름은 물무궁화(히비스커스). 푸른 하늘 흰 구름이 수면에 비쳐 하늘에 피는 천국의 꽃처럼 보인다. 꽃말은 자제, 보존, 섬세한 사랑. 이미 식어버린 내 눈가에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요염한 불길이 옮겨붙는다. 그 불이 뜨거운 줄 모른 채 불구경한다.
섬세함이란 누군가를 배려, 티 나지 않는 기다림, 그 꽃불에 타 죽을지라도……
껑충 발뒤꿈치를 돋운 열대 수련들은 때마침 피어나서 이 여름 아름다운 자태로 생존한다. 수련과 함께 늦여름 끝자락을 잡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한가. 저 영원할 것 같은 꽃들도 달포만 지나면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만다.
매미들아, 조금만 더 기운차게 울어주렴.
헤비메탈 쇳소리 고막이 따갑도록 울어주렴.
극한에 내몰린 열기가 지쳐 스러질 때까지 울다 보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줄 테지.
우리의 여름은 끝장을 보고서야 물러날 테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스바 깨물고 달콤한 캔커피 마시며 나의 짧디짧은 휴가는 끝나버렸다. 이렇게 막바지 여름휴가 후련하게 다녀왔다. 그 밤 나는 한 사람의 생존 반응이 끝나버려서 눈물이 났다. 오랜만에 어떤 브런치 작가님의 글방을 들어가 보았더니 마지막 글이 6월 말 어느 날짜로 멎어있었다.
이전 글은 이미 읽어서 익숙한 글이었다. 매일같이 글을 발행하는 부지런한 분이신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 마지막 글에 답글이 유난히 많이 달려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 읽어보았다. 아, 그분은 운명을 달리하셨다.
멎어버린 그간의 침묵에 조의를 표하며 마음이 아려왔다. 신의 그림자를 좇던 그분의 돌로미티, 파타고니아를 나는 경외심으로 지켜보았었다. 지난해 새해에는 덕담을 답글로 건네주셔서 따뜻한 어른이시구나, 훈훈하게 마음 데웠다.
히비스커스 같은 그분의 꺼져버린 불꽃은 그 글방에 남아서 계속 타오르리라.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글 한 자 한 자 행간에 체온 숨결 지문이 묻어있다. 그 글이 쓸만하다면 창의적인 사랑을 머금는다. 언젠가는 누구나 펜대가 꺾인다. 지고지순한 한 사람의 열정을 충분히 사르기에는 이 세상의 생존시간은 후하지 않다. 꿈같은 인생의 화양연화를 언제 꽃피울 것인가. 돈 시간 건강이 허락하는 황금기를 놓치지 말자. 유한한 시간의 바다에서 황금을 캐자. 그것만이 나의 소중한 보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