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Sep 13. 2023

동전을 대하는 태도

몇 년간 받아먹기만 먹고 배출하지 않아서 소화불량 걸린 돼지 저금통을 터는 오늘은 계 타는 날. 잔뜩 무거운 저금통 두 개를 들고 와서 거실 바닥에 쏟아부었다. 동그란 동전들이 철컥철컥 소리 내며 끝없이 쏟아진다.


특히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와인 케이스를 재활용해서 만든 저금통이 쇳소리 나는 은빛 폭포수를 콸콸 쏟아냈다. 차 세차할 때 요긴한 오백 원짜리 동전을 수시로 꺼내 써서 백 원짜리 동전이 많았다. 자, 지금부터는 철탑을 쌓아보자.


백 원 동전을 스무 개 높이 동시다발 쌓았다. 오십 원 동전도 스무 개, 십 원짜리 동전은 가장 화려한 황금탑이 되었다. 동전을 하나씩 쌓아 올릴 때마다 소원이라도 빌어야 되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모은 정성과 시간을 보더라도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전에 대고 소원을 비는 건 구리다. 한낱 동전 쌓기에 무슨 공력이 들어간다고 호들갑을 떠나. 누가 알아준다고? 슬슬 합산 얼마나 될지 속셈 들어간다. 대략 칠팔만 원 정도 될 것 같다. 이걸로 맛있는 점심 사 먹어야지. 점심을 먹고도 남는 돈은 식기세척 브러시, 러그 한 장 사면 되겠다. 아, 공돈이 생겨서 행복하다.


묵직한 중량 종이백을 트렁크에 싣고서 가까운 은행에 들렀다. 전에 보니까 내 명의 통장이 있으면 바로 입금해 주었다. 은행 창구는 대기 손님 없이 한가했다. 번호표를 뽑자마자 바로 번호가 떴다.


“동전을 교환하러 왔습니다.”

종이백을 들어 보인다.

“지금은 교환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 ‘동전 교환 시간 오전 10~11시’ 푯말이 제작돼 있었다.

“창구에 손님도 없는데 해주시죠.”

“규정이 정해져 있어서 안 됩니다.”

“어렵게 왔는데 안 될까요?”

은행직원은 대답 대신 웃고 만다.


아쉽지만 돌아서야 했다.

무거운 동전 가방을 다시 트렁크에 넣고 나니 힘이 빠진다.

이 노릇을 또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구 맘대로 오전 특정 한 시간 정해놓고 그 시간 맞춰 오라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만약 수천만 원짜리 돈다발을 들고 와서 입금한대도 저런 태도를 취할지 의구심이 든다. 보잘것없는 동전이라고 은행이 천대하는구나. 동전 전용 입출금 ATM기를 설치해주면 좋을 것을... 귀한 지폐는 소리가 나지 않는데 천한 동전은 짤랑짤랑 시끄럽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모든 화폐의 단위는 십 원짜리 ‘0’에서 시작된다.

십 원 단위 0이 받쳐줘야 백 원이 되고 천 원이 되고 억에 이른다.

화폐 업무를 총괄하는 은행에서 십 원을 우습게 알다니 기본이 안 돼 있다. 기본은커녕 자기들 맘대로 규정을 정해놓고 무겁게 들고 온 고객을 문전박대한다. 손님 한 명 없는 창구 파리 날리면서도 두 손 놓고 규정을 들먹인다. 오만무례하다.


집집마다 잠자는 동전이 동전 회전율을 둔화시키고 있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현금결제를 하지 않는다. 그냥 카드나 스마트 페이를 쓱 내민다. 지갑에 동전 굴러다니던 예전에 비해 동전 넣어 다닐 일이 없어졌다. 카드 한 장 없는 부모님은 예나 지금이나 현금을 사용하신다.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주고받는 손길에 꼭 딸려오는 동전.


거스름돈을 위해 꼭 필요한 동그라미들이다. 한국은행과 조폐공사는 새로 만들어진 동전들이 유통되지 않아서 매년 181억의 세금을 들여 또다시 새 동전을 만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한다. 2021년 한국은행에서는 10원짜리 동전을 12억 3100만 원어치 발행했지만 이 중 19.2%에 해당하는 2억 3700만 원어치만 환수된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막상 어렵게 모은 동전을 들고 어렵게 시간 내서 은행에 가면 규정상 지금은 바꿔줄 수 없다고 등 떠민다. 그 옛날 로마 황제들은 제국의 팽창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로마의 힘과 지배에 대한 개념을 모든 신민에게 전파하는 주화를 발행했다. 황제의 업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작고 가벼운 주화는 거대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쉽게 닿을 수 있는 통치 수단이었다고 한다.


불에 쉽게 타는 지폐와 달리 땅속에 파묻혀도 썩지 않고 영속적인 동전들은 생명력이 강하다. 어릴 때 색 고운 색동지갑에 들어가는 세뱃돈은 전부 동전이었다. 통통하게 배부른 색동지갑은 한동안 한라산 캐러멜(눈 쌓인 백록담을 상징하듯 하얗게 과당 입힌 삼각형 모양)을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이 돼주었다.


마트에 가서 물가를 비교할 때조차 십 원 단위 끝자리 숫자를 보고서 선택한다. 990원과 1,000원은 재고할 여지없는 선택을 가른다. 990원은 얼마나 간사한 숫자인가. 십 원 하나만 더 붙이면 천 원 단위 앞자리 숫자가 달라진다. 그래서 판매업자들은 끝자리 물건값을 990원 고수하는 판매전략을 포기하지 않는다.

‘티끌 모아 태산, 천 리 길도 한 걸음, 천만 원도 십 원에서부터.’

십 원을 소중히 생각하고 다루는 사람이 큰돈을 모은다.


통장에 남은 잔고도 그냥 두면 푼돈, 적금 통장으로 매달 꼬박꼬박 이체하면 쏠쏠하게 목돈이 붙는다. 돈을 잘게 쪼개서 여러 개 이름 붙인 적금 통장에 불입하면 지출을 더 짜임새 있게 쓸 수 있다. 여행 자금 모으는 여행통장, 다독임이 필요한 자신과 가족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돈을 꺼내 쓰는 선물통장, 노후통장 등등.


당분간 일급보안 현금수송차량을 몰고 다니게 생겼다. 마트 다녀온 물건 꺼내는데 트렁크 구석에 자리 잡은 흰 종이가방에 자꾸 눈길이 가닿았다. 곗돈 쳐다보는 즐거움과 무거운 숙제를 떠안은 두 가지 느낌이 교차한다. 공돈으로 밥 사 먹고 기분 내고 싶은 날 바로 그날 돈 자루를 후련하게 처분하련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존 반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