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계약서를 작성한 기념으로 근사한 저녁을 외식하고 근처 호숫가로 나가보았다.
호루라기를 부는 듯이 “호롱호롱” 흐느끼는 중저음 풀벌레 소리가 달팽이관으로 파고든다.
미물이 어찌 저런 음색과 곡조를 뽑아내는지 호소력 짙은 독보적인 창법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저 호루라기를 부는 풀벌레는 작사 작곡에 능한 싱어송라이터임에 틀림없다.
팔월 초부터 들리기 시작한 자연의 소리가 절정기에 이르러 다양한 변주들이 우리 귀에 들린다.
지긋지긋한 더위를 물리쳐가며 가을을 부르는 노래를 들려준다.
서늘하다. 카디건을 걸쳤는데도 서늘한 기운이 파고든다.
16도, 여기서 더 기온이 떨어지면 나같이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은 바로 패딩으로 직행해야만 한다.
호수를 가로지른 다리 위로 야간 조명이 은은하게 빛이 난다.
저 건너편 화려하게 불 밝힌 빌딩 야경 또한 물 내음에 실려 로맨틱한 밤.
서편 하늘에 걸린 초여드레 초승달이 엷은 물안개 같은 구름에 잠겨 흐려졌다 선명해졌다 가면놀이를 한다. 여느 때보다 더 큰 슈퍼초승달 같다.
여리기만 한 그 빛이 호수에 비쳐 한 줌 떠다닌다.
빛을 그득 태운 종이배가 물살에 흔들흔들 … 신비롭다.
강물에 떠다니는 달빛을 본 지가 까마득한데 이 저녁 허공을 관통하여 호수에 가닿은
반에 반쪽도 안 되는 초승 달빛을 걸음을 멈추고 서서 바라본다.
그런데 밤 호수는 눈앞에 희한한 마법을 부린다.
커다란 아나콘다 뱀이 넙죽 엎드려있다.
저녁 식사를 나처럼 거나하게 먹어치운 뱀은 뱃속에 야광 먹이를 잘게 쪼개어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다.
노란색 초록색 번쩍거리는 불빛 용서고속도로를 집어삼킨 아나콘다는 포만감으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축 늘어져 한껏 여유를 부리는 뱀 모가지 바로 위아래 이 저녁을 축복하는 초승달이 제3의 눈처럼 불그스름 빛난다. 두 개 달이 완벽하게 떠 있다. 어느 것이 실체이고 어느 것이 허상이란 말인가.
산은 또 어떤가.
상하 일체를 이루는 산의 덩어리가 거대한 아나콘다를 만들어냈다.
수면을 경계로 검은 물감을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짜고 중간중간 노란 물감 초록 물감을 점찍듯이 짠 다음 반으로 접어서 꾹꾹 눌러준 다음 쫙 펼친 데칼코마니 아니던가.
물에 빠진 산과 달을 실체라고 우긴들 부정하고 싶지 않은 이 완벽한 조화를 속으면서 감상한다.
밤이면 밤마다 꿈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분신, 나와 영적 파동이 비슷한 소울메이트가 살아가고 있을 시공간, 육안이 수용하는 우주 지평선 저 너머 펼쳐져 있을 형이상학적 시공간이 식별 가능한 나의 현실에 대한 허상이요. 부인할 길 없는 실체이다.
눈앞에 엎드린 아나콘다의 실체를 지나가는 어른을 붙잡고 물어보면 피식-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갈 것이다. 아이에게 묻는다.
“얘야, 저기 기어가는 큰 뱀이 보이니?”
비좁은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는 “안 보여요.” 대답한다.
벌써 속물이 든 아이는 평범한 어른의 반응을 보인다.
저런 신기한 광경을 보고서 걸음을 멈추고 기이하게 여긴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잠시 잠깐 불꽃놀이처럼 나타났다 스러지는 쇼!
그것에 흥겨워하고 눈이 생글거린다.
어디 가서 돈 내고 입장권 끊고 이런 고차원적 예술을 접할 수 있으랴.
밤이어서 호수여서 때마침 초승달이 떠서 꿈같은 그림을 감상하였다.
달이 지고 이 밤이 흘러가면 완벽한 대칭 구도는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만 운 좋게 포착한 순간을 접어서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어둔다.
일주일 지나 다가오는 한가위 보름달이 뜨는 밤 또 한 번의 신비로운 대칭 구도 속으로 걸어가 봐야겠다.
그 달빛이 금 간 내면으로 스며들어 정화작용을 해주리라 기대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