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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12. 2023

가을날의 사치

가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단풍이 들어 시야를 자욱하게 물들이면 가을 여자가 되어 호젓한 거리를 걸어봐야지 마음먹다가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어느새 낙엽 진 거리에 찬바람이 분다.

옹이진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려면 슬며시 지나가는 가을에 예의를 차리고 싶다.

나무들도 멋지게 변신하는데 늘 입던 외양 말고 새로운 컬러를 입히면 어떨까.


그렇다고 평소 안 입던 화려한 색을 걸치면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어색하다.

이럴 땐 어깨 위에 떨어진 고운 낙엽을 얹듯 포인트만 주면 된다.

자주색에서부터 보라색 와인색에 이르는 농후한 빛깔의 스카프를 둘러 완숙한 내면을 꺼내 보이면 나무들의 패션 감각에 뒤처지지 않는 멋을 연출할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이런 색깔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중년이 되긴 됐나 보다.

옷은 무채색을 고수하는데 가방이나 소품은 웜톤 계열 걸치는 걸 좋아한다.

국화 화분을 사서 창가에 두는 것도 가을에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차 마시는 테이블에 데려와서 눈길 주며 음악과 함께 음미하면 마음 맞는 친구 못지않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입고 걸치고 눈요기하고 또 누릴 수 있는 가을의 사치는 뭐가 있을까.

천고마비의 계절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가을에만 먹을 수 있는 식도락 거기 더해 향까지 스며있다면 금상첨화이다.

그 먹거리는 내 고향 특산품이어서 더 각별하다.

지난 추석 고향 내려갔을 때 잠잠하기에 올해는 생산량이 극소량인가 보다 여겼다.

지난해 대형 산불은 균주까지 태워버려 앞으로 십여 년간 꿈도 못 꿀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산불 발생지 남쪽인 내 고향은 예년과 다를 바 없나 보다.

시월 첫째 주 들어서면서 회귀 어종 돌아오듯 송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먹으면 먹고 말면 말고, 송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편이어서 흘려들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송이 안 사 먹을래? 오늘 엄청 많이 나왔다.”

본격적으로 출하량이 많은 이때가 가격이 가장 저렴하지만 등외품도 킬로당 십만 원을 훌쩍 호가하는 고급 식재료이다. 아흔 노모가 발품 팔아서 알려주는 로컬 핫뉴스, 안 사 먹을 수가 없다. 


송이 균사체는 지중 온도가 14~24℃ 상태로 대략 2주간 유지하여야 한다. 31℃를 넘으면 균사체가 죽어버리고, 14℃ 이하인 경우 성장이 멈춰버리는 까다로운 생육조건을 가지고 있다. 강수량 또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한다.


올해 9월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예년에는 9월 말 송이를 맛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그만큼 생육이 늦은 편이다. 솔잎이 수북이 쌓인 마사토 지역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 송이는 가을이 무르익기 전 가을 전령사처럼 잠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단풍이 들기 직전 요맘때가 송이 제철이다.


물기 묻은 봄 미나리가 봄의 향기를 선물하듯 송이는 깊은 산속 가을 향기를 머금었다. 

한 송이 들고서 코끝에 가져가면 상쾌한 솔향이 진하게 풍긴다. 

눈을 가려도 금세 식별 가능한 진귀한 자연산이다. 


아작거리는 식감은 여느 버섯과 다를 바 없는데 흉내 낼 수 없는 향을 머금어서 송이는 최고로 친다. 어떤 식재료를 만나더라도 은은한 솔향을 배게 한다. 전에는 비싸기만 한 송이 향이 귀한 줄 몰랐다. 부모님이 사서 몇 송이 나눠주시니까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이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송이 대접을 제대로 해주고 싶다. 

보관부터 신중히 다루고, 음식을 입에 넣기 전 향을 음미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외진 산기슭 소나무 아래 온도 습도 토양의 조건을 모두 갖춘 후에야 서늘한 가을과 함께 출현하는 귀함을 이제 귀한 줄 알게 되었다. 


향기를 머금는 단계는 자질구레한 욕망을 제어한 정신 수양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고차원적 시그널이다. 좋은 냄새 불쾌한 냄새를 뿌리치고 후각이 맡을 수 있는 최고 레벨을 ‘향’이라 부른다. 

내용물을 볼 순 없어도 냄새를 맡으면 내용물을 유추할 수 있듯이 내용물을 싸고 있는 외피도 냄새가 밴다. 

담배 종이는 담배 냄새가 배어있고, 말린 꽃잎 주머니에서는 향기로운 꽃내음이 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난다.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그는 그 향기를 취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절벽에 핀 난꽃처럼 외롭고 남들이 쉽사리 가지 않는 길을 걸어왔다. 

그의 향기는 그의 고매한 인격을 말해준다. 

표리부동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근절한 그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따스한 향불을 사른다.

그 불은 꺼지지 않는 빛, 그 빛이 향내가 난다. 


향기로운 사람은 사계절 향이 난다. 

봄은 봄이어서,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수박 향이, 가을은 정결한 국화 향이, 추운 겨울에는 하얀 눈꽃 향기가 난다. 표정과 말투는 따라 할 수 있지만 향기란, 도저히 훔쳐올 수가 없다. 


송이는 신선들이 먹는 하늘나라 음식이 아니었을까. 

송이를 먹은 나도 푸른 솔잎처럼 눈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 푸름을 간직하고 싶다. 

오후에 택배가 온다는 알림이 왔다. 

내 집 앞 소나무들은 절대 키울 수 없는 귀한 가을 손님을 기다리면서 설레는 하루이다.    




                

이 바구니에 담긴 송이가 오늘 온다고 합니다.. 1kg는 이것보다 양이 적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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