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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Nov 21. 2023

그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 넓은 대양 앞에 홀로 앉아서 어떤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

녹색 군청색이 어우러진 짙은 녹회색 바다는 인정사정 눈물이라곤 모르는 금속성 쇠붙이 같았다. 

세상 모든 눈물과 강물이 흐르고 흘러 가닿는 종착지 아니었던가.


현실과 외따로이 동떨어져 무의식이 지배하는 칸막이 안 깊숙이 들어와 버린 느낌, 길이 끝나는 기슭에 이르러 오묘한 깊이 서슬 푸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반짝이는 윤슬이 드리워져 실시간 살아 움직이는 비늘이 꿈틀대는 몸체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물, 그 생물의 눈을 찍는 화룡점정 태양마저 짙은 구름에 가려져 은회색을 띠었다. 어둑어둑하여 막 떠오른 태양인지 달인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구름이 걷혀 제시간을 말해주기를 기다리며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하늘은 무참히도 내 기대를 저버렸다.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더니 희멀건 태양을 집어삼켰다.

그나마 남아있던 녹색 빛깔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빛을 잃은 바다는 금세 암흑으로 어두워졌다.

그 순간 막막한 두려움이 일었다.


하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저편 구름에 띄우더니 목숨을 거두어가려 작정한 것 같았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세계는 말이 통하지 않는 비언어적 세계, 무의식 심층부에서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린 표출 그것은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울음이었다. 얼마나 쩌릿쩌릿 전율했는지 내 울음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이 깼다.

꿈이었다. 아, 그런 바다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무서운 바다였다.


명사십리 경포대는 화창한 늦가을 바람이 연신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스카프 자락으로 머리를 감싸 묶었다.

같은 동해안인데 내 고향 바다와는 색과 결이 다르다.

모래 해변이 워낙 길게 드리워져 파도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없어서일까.

제멋대로 춤추는 파도는 수천수만 갈래 바다는 쨍쨍한 햇빛을 얹고도 청남색으로 굳어 있었다. 

지난 시간 입시에 매달린 아이가 이 너른 바다 앞에 서서 가슴에 맺힌 체증 다 풀어내기를 바랐다. 

약발이 제대로 먹혔나 보다. 얼굴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알락꼬리원숭이 미어캣 요정들이 숨어서 이른 크리스마스트리를 점등한 호텔 로비 바깥 청정한 솔잎 사이로 초이레 초승달이 걸렸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허균을 배출한 고장답게 문인의 눈썰미를 닮은 초승달이 느슨해진 늑골의 현 한 줄 ‘퉁’ 건들어 바짝 조이는 소리 들려온다.

밤바다가 실시간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온다.


동해 바닷가에 붙어있는 동산 아래 서늘하게 파고드는 밤 파도 소리에 여러 번 잠이 깼다. 

발코니로 나가보니 가로등 불빛을 입은 해안가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흰 파도가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해도 달도 잠자는 깜깜한 밤바다는 무엇 때문에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걸까. 

환한 대낮보다 더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수평선이 왜 깨어지지 않는지….


밤낮 처절하게 고뇌하는 파도를 시시각각 일깨움으로써 수평 감각을 잃지 않는 바다. 

언제나 깨어있으면서 영성으로 가득 찬 바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실은 치열하게 번민하면서 가까스로 가닿은 피안의 세계, 이따금 후려치는 파도를 덥석 맞으며 바위섬에 뿌리내린 소나무 한 그루 애지중지 키울 줄 아는 바다.


그 고요한 밤바다 위로 오징어잡이 집어등이 수평선을 뚝뚝 끊어내며 일렬로 반짝거렸다. 

오리온자리 삼 형제 별, 북두칠성, 큼직한 샛별도 대어를 낚으려는 밤바다에 오롯이 떠 있다. 

모두 잠든 이 밤 저 바다는 오징어 서바이벌게임을 하고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


밤바다에 뜬 별빛 아래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보긴 처음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것처럼 보이는 바다는 실제 기쁨에 겨워 웃고 있지 않을까. 

울면서 간간이 웃기도 하는, 그러면서 설움이 저절로 가라앉은 치유의 바다는 살랑살랑 달빛을 태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지배하는 빛이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


바다에 가면 꽉 막힌 속이 뚫린다. 

살아가는 일이 오리무중 답답할 때 바닷가에 서면 심심한 위로를 얻는다. 

전쟁이 터지는 지구촌 곳곳 화염의 상처를 푸른 별로 보듬는 소금의 힘이 내 안에 스며들기 때문이리라.


정동진 바다부채길 암벽들은 칼로 저며놓은 수직 단면에 거친 해풍을 맞으면서 도깨비쇠고비 갯장대 둥근바위솔 해국 해당화를 키운다. 투구 바위는 뾰족한 뿔모자를 접어서 소나무를 키운다. 척박한 험지에 살아가면서도 생명을 품어 키우는 해안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배울 점이 많다. 


심곡항으로 갈 때 흰 포말이 부서지는 갯바위 부리에 갈매기 한 마리가 호젓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정동진으로 돌아올 때도 꼿꼿한 자세 흐트러짐 없이 좌선하고 있는 저 멋쟁이 갈매기도 고독하거늘 살아가면서 바다가 되어볼 일이다.


바다보다 더 짠 눈물을 흘리며, 투명한 병 속에 담긴 나의 애틋한 시간을 바닷물에 둥둥 띄워 보내며, 바람 부는 해안가를 거닐며, 저 수평선 반 토막 내 안에 들여놓고 싶다. 꿈에서 본 무섭도록 황홀한 그 바다에 닿을 때까지.               







경포대
잠들지 않은 밤바다
집어등 불빛과 별
해돋이
송정해변 오솔길
정동진 바다부채길
자존심 강한 갈매기는
고독한 갈매기이다
투구 바위
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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