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원고를 퇴고하였다.
여든 편이 넘는 분량을 줄여서 칠십 편 거기서 한 번 더 부피를 압축하여 예순두 편으로 줄여놓았다.
총 5장으로 분류, 각 장마다 글감을 넣고 빼고 소분류, 챕터 제목을 정하고 제목 아래 요약 내용도 추려놓았다. 수험생 학부모라서 원고만 붙잡고 늘어질 순 없었다. 입시 정보에 신경을 쓰느라 계절은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책상 머리맡에는 수작업한 글 순서 리스트와 임시로 그려놓은 표지 그림이 연필 자국과 함께 나뒹굴고 두꺼운 대학 입시 가이드 책이 뒤섞여있었다. 대학 지원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니 방충망에 붙은 매미가 아침부터 요란하게 불볕더위를 예고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천고마비의 계절 출간하려면 출판사를 알아보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 출판사를 알아보는데 두어 달 훌쩍 지나버렸다. 달력 날짜를 보니 어느새 구월 말, 출판사 한 곳을 다녀와서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교정작업은 한 달여 만에 수월하게 끝났다. 편집 작업이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이 입시와 편집 작업 두 마리 토끼를 좇는 나는 정신줄을 꼭 붙들어 맸다. 어느 것도 놓칠 수 없는 절실한 과업이었다.
편집은 글자 크기 서체 색깔 사진 표지 선정에 이르는 책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작업인데 편집자와 저자 간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1차 편집본을 받고 나니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이 띄었다.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고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내용은 내용 대로 거듭 읽으면서 표지부터 머리글 본문 뒤표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 샅샅이 관여하였다. 주고받은 편집본만 대략 6차에 이르는 것 같다.
그 사이 수능 시험이 치러졌고 아이는 평소 실력 발휘를 못한 것 같다며 낙담하였다. 수능날 바로 옆자리 앉은 빌런이 시험 시간 도중 화장실을 두 번 다녀오고 코를 훌쩍거리는 불운을 감당하면서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최선을 다한 하늘이 무심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12월, 완성품을 향한 책 출판은 가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는 서울 소재 대학교 수시 논술에 최종 합격하였다. 다섯 명 뽑는 바늘귀를 스스럼없이 통과한 아이가 너무나 대견하였다. 해넘이 전 내 품에 안길 것 같던 책은 결국 신년으로 미뤄졌다. 오히려 잘 되었다.
새해 새 기분으로 신간 출간 소식을 전하는 것이 더 폼나 보이니까.
자유로를 달렸다. 몇 년 전 큰아이 대입 미술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이른 새벽 달렸던 곳이다.
실기고사를 치르고 나니 겨울해가 떨어져 한강변 금빛 억새를 붉게 물들이던 그림이 아직 눈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 필름을 되감으며 우회전 허름한 건물들이 흩어진 비좁은 골목을 어지러이 파고들었다.
네비는 어떤 프린팅 간판이 붙은 커다란 공장 같은 건물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남연우 저자인데요, 도착했습니다."
"들어와서 이 층으로 올라오세요."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는 그리로 가면 되나요?"
"네"
종이 박스같이 압착된 물건들이 높이 집적된 입구로 무작정 들어갔다.
엄청난 기계 소음과 함께 석유화학 프린트 냄새가 진동하였다.
핸드백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순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딴 세상에 밀려 들어온 기분이 든다.
온통 철컥철컥 소리 내는 기계들이 작업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쇄소 내부는 끝이 안 보였다.
거대한 기계에 가려져 공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한 치 실수도 용납 않는 무표정하고 능숙한 작업자들이 갑자기 나타난 방문객을 힐끔 쳐다보며 이내 작업에 임한다. 그들의 치열한 직업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우측으로 비스듬히 놓인 철제 계단이 보인다. 저긴가 보다.
계단을 올라가자 어떤 분이 나오셨다. 출판사에서 소개받았던 부장님이시다.
그분은 거친 기계 소음이 난무한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치 일층과 이층이 저만치 분리된 공간에서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만 관장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 문을 닫자 이상하리만치 소음은 멀어져 조용하였다.
지금 프린트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그분이 내민 미지근한 물 한 컵을 마시면서 조금씩 일렁이는 긴장감을 다독였다.
지난 일 년 아니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기 위하여 걸어온 길이 지면 위로 깨끗하게 원하는 모습으로 활자화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며칠 전부터 고대하였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가마에 굽는 도공의 마음이 이러할까.
잠시 후 부장님은 표지와 본문 샘플을 가져왔다.
제일 조바심 냈던 본문 제목 색깔이 편집본 그대로 인쇄되어 안도하였다.
청록색 이 특별한 색을 고르려고 글자색 팔레트에서 여러 번 섞고 또 섞어 까다롭게 뽑아낸 색이었다.
두꺼운 표지를 만져보고 질감을 보니 내가 고른 그 종이가 아니었다.
아, 이래서 감리 작업이 필요한가 보다. 내가 고른 그 표지로 즉시 수정되었다.
드라마 마에스트라에서 '더 한강 필하모닉' 대표이사 배우를 닮은 부장님이 넌지시 물어본다.
"혹시 표지 사진이 저자님이신가요?"
"네. 프로필 사진이 표지 사진이 되었어요."
"아, 그러시군요."
저자 허락이 떨어진 인쇄작업은 즉각 속도를 내며 일층으로 내려오자 본문이 여러 장 동시에 인쇄된 전지 사이즈 종이들을 기계가 밀어내고 있었다. 부장님은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였고 그중 한 장을 접어서 책 사이즈로 잘라서 내게 주었다.
갓 구워진 빵처럼 온기를 간직한 책의 일부를 소중하게 받아서 다시 집으로 가는 자유로를 달렸다.
이제야 형체가 분명한 책이 일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숨 돌렸다.
가시화된 책은 다음 주 내게 올 것이다.
이게 뭐라고 그토록 매달렸단 말인가.
인생 전반기를 서술한 책이어서 매달렸다. 하나의 마디를 정의한 책은 헨델의 파사칼리아처럼 저음부 고음부 변주를 거듭하는 악기 소리가 난다. 때로는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너무 아픈 비창은 과감히 잘라내었다.
아무도 들을 수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