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이다. 전날 묵나물을 삶아서 불려두었고 늦은 밤 밤을 깎았다. 한겨울에도 신선한 초록색 채소와 새빨간 딸기가 밥상에 오르는 요즘 내 또래 주부들은 오곡 찰밥에 나물 반찬을 굳이 챙겨 먹지 않는다. 점점 사라져 가는 이 세시풍속을 한 해 제일 큰 보름달과 함께 한 해도 빠짐없이 낭만적으로 챙긴다.
이것도 음식이 될까 의구심을 돋우는 말라비틀어진 취나물 다래순을 물에 불려 푹 삶았다. 타래 튼 고사리도 부드럽게 삶아서 들기름 참기름 국간장으로 볶고 달맞이하는 저녁 무렵 태어났다는 생일 미역국도 끓였다. 붉은팥, 잣, 대추, 밤을 넣은 찰밥도 한 솥 가득 뜸 들였다.
맛있고 점성이 강한 찰밥을 먹으면서 너끈히 살아갈 끈기와 근기를 먹는다.
이 중요한 음식을 생략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한 한 해 첫 시작의 식순을 빼먹는 것과 같다.
달의 움직임을 표준으로 삼는 전통 음력 사회에서는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이 큰 명절이었다.
달은 여신이고 대지이며 농경사회에서 풍요를 상징하였다.
열나흗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잠을 안 자는 ‘보름새기’도 풍요로운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달빛에 감흥하는 낭만적인 의식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바르샤바 협주곡’(영국의 작곡가, 리차드 애딘셀 작곡)은 1941년 개봉한 영국영화 ‘Dangerous Moonlight’ 배경음악으로 만들어진 영화음악이다. 어느 달 밝은 밤, 독일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건물에서 피아노 멜로디가 새 나온다. 그 소리에 이끌려 길을 가던 뉴욕의 신문 기자 캐롤은 피아노를 연주하던 스테판과 처음 만나게 된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는 공군 제복을 입고 작곡 중이던 ‘바르샤바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스테판은 아름다운 캐롤을 보고 영감이 떠올라 곡을 완성하고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전쟁통에 헤어지게 된다.
이후 스테판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연주회를 하던 중 캐롤과 재회 결혼하게 되지만 조국 폴란드를 생각하며 영국 공군으로 다시 들어가서 적기와 싸우다가 추락한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스테판은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그런 그를 위해 캐롤은 틈나는 대로 ‘바르샤바 협주곡’을 불러준다.
그런 어느 날 건반을 두드리던 그는 ‘바르샤바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게 되면서 기억을 되찾고, 폴란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캐롤에게 건넸던 말을 한다.
“달빛이 밝을 때는 밖에 나가는 것이 위험하다.”
달빛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사람의 이성을 붙들어 매고 감성을 부풀게 한다. 달의 인력이 강해지면서 조수간만의 차가 커지듯 무의식에 저장된 억압된 감정이 표면 위로 올라오면서 나자리노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늑대소년이 되고 만다.
신윤복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은 눈썹달이 빤히 지켜보는 야밤중 등불을 비추는 선비와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이 담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장면을 그렸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쟁반같이 둥근달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고 내 눈썹 위에 걸리고 웅크린 마음 위로 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어두침침한 뒷골목 가로등으로 떠 있으면… 한 달에 단 하루 저 보름달을 따서 바람이 몹시 부는 풍기대(風旗臺)에 걸어놓고 시시각각 달랠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밝혀놓으리라.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가 들어있는 저 휘영청 청명한 달에도 인간의 쓰레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지구에서 38만 4400km 떨어진 달 표면에 1972년 아폴로 17호가 착륙했던 이래 여러 나라 민간기업들이 무인 우주선을 보내면서 45억 년 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던 달에 지구 쓰레기는 집적되었다. 2012년 NASA가 집계한 달 쓰레기는 우주선 잔해, 각종 장비 등 50만 파운드(약 226.7톤)에 달한다.
달에는 공기 대기 바람이 없으므로 남긴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몽매한 인간들이 버려놓은 쓰레기로 인해 달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구를 내다본다.
‘제발 가까이 오지 마.’
달이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언젠가 달은 심우주로 가는 우주 정거장이 될 거라는데, 한 달에 두 번째 보름달이 뜨는 행운의 상징 블루문, 개기월식 때 달이 붉게 보이는 레드문, 올해 10월 17일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슈퍼문, 저 문을 여는 순간 위험한 달빛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