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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10. 2024

아지랑이와 꽃샘추위

지난 2월, 새별오름에 올랐을 때 먼발치 대지 위로 아른아른 너울거리는 투명한 불꽃을 보았다.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그 불꽃은 제 신명에 못 이겨 춤추는 무의 동작이었고 환영(幻影)의 몸짓이기도 했다. 포근한 봄 햇살에 굳었던 흙이 스르르 녹으면서 내쉬는 입김 같았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해님처럼 땅의 거죽을 한 겹 벗기는 온기 아닐까.


새싹을 내밀기 전 땅의 워밍업, 먼 풍경 너머 바라보이는 훈김을 알아차렸을 때 봄은 고운 꽃신을 신고 사뿐사뿐 길을 나선다. 처음에는 아장아장 걷는 듯이 보이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달음박질 앞산에 꽃이 피고 먼산이 울긋불긋 색채의 향연은 깊어진다.


어떤 작은 변화나 낌새를 알아차리기 이전 예열작업을 아지랑이에 비유해 본다.

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나만 아는 불꽃을 태우고 또 태웠다.

성냥불을 태우다가 꺼지면 매캐한 황 냄새나는 성냥을 연신 그어댔다.

파란 불꽃이 발화하면서 붉은 불꽃이 확 일어나더니 금세 까맣게 타버린 나무조각은 사그라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타버리는 불꽃이었다.


종이에 불을 붙였다.

조금 더 오래 타는 것 같더니 마찬가지였다.

불은 불쏘시개를 먹어치우며 계속 새롭게 먹어치울 무언가를 원했다.

기름을 바른 장작개비가 필요했다.

겨울 아궁이를 데우는 땔감이 나의 문학이었는지 모른다.

냉랭한 손과 마음을 따스하게 쬐는 불길을 한 자루 연필에 옮겨 붙여가며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했다.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지랑이를 굴뚝 위로 내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지근하더니 점점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꽃이 필 때도 되었는데.. 꽃이 필 무렵 동산에 올라 메아리를 불러보고, 봄 시냇물을 따라서 걸어가 보기로 한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으로 나가는 새싹의 용기가 필요하다.

겨우내 내리누르던 무거운 흙을 밀치고 영차영차 쑥쑥 올라가 보기로 한다.

버들잎 새움 틔우며 시냇물은 졸졸 흘러서 간다.

굽이굽이 흘러 흘러 때로는 수다쟁이 때로는 조용조용 제 갈 길을 간다.

새로운 한 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샛노랗게 굼뜬 산수유가 꽃망울을 펼쳐 보일 때 꼭 훼방을 일삼는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춘삼월은 가는 겨울과 다가서는 봄이 세를 겨루는 날들이 이어진다.

서로 밀고 밀리고 물러서지 않으려 힘 대결한다.

그 치열한 눈치싸움 속에서 꽃눈들은 상처 입은 불안한 눈빛으로 밖을 내다본다. 

파리한 혈관이 내비치는 시스루 벌로 속살 에는 추위 내몰릴 없기에 더더욱 움츠러드는 꽃님들이 가엾다. 


패딩은 지겨워서 도저히 못 입겠다, 엄동설한보다 더 춥다는 이 날씨에 꽃분홍 스카프를 두른 봄 코트를 입고서 지난해 본 야생화들의 근황을 살피러 간다. 날짜를 보니 사흘 빠른데 날씨까지 변수가 생겨 달력에 표기된 날짜를 알 까닭이 없는 그네들이 나오지 않는대도 실망하지 않겠다.


제법 맵찬 바람을 맞으며 찾아가는 데는 한가닥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본 결과 약속을 쉽사리 어기는 인간들과 달리 자연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나의 믿음은 맹신에 가깝다. 무턱대고 믿고 보는 것이다. 거기 그 자리 약속한 날짜에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언제나 나와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일주일 시차가 발생해서 미리 져버린 경우는 있었다. 이것 또한 인간들의 과욕이 부른 환경재앙이지 자연이 스스로 잘못한 것은 아니다.


수목원 입구를 걸어가서 지난해 복수초들이 살던 거처를 살펴본다. 이제 붉은 실핏줄같이 선명한 줄기가 올라오고 잎이 펴지지 않은 솔잎 같은 뭉치들을 내밀면서 노란 꽃봉오리들이 핀 것도 있고 봉오리 진 모습도 있는데 날씨를 살피는 눈치이다. 눈 쌓인 얼음을 둥글게 녹이면서 봄볕을 한 아름 반기는 제일 먼저 피어나는 얼음새꽃, 장하다 장하구나! 노란색은 인내의 빛깔이라고 여러 번 표현한 적이 있는데 산수유가 그렇고 복수초가 그렇다. 겨우내 참고 참은 눈물을 닦은 앞치마 빛깔은 노랗다. 노란 가루를 묻힌 꽃술 속눈썹에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햇살이 찬란하게 떨어진다.


서향을 등진 동산 아래 음지에도 푸른 난초과 이파리들이 초록색 불을 지핀다. 

역시 지난해 만난 적 있는 설강화들이 오밀조밀 피어났다. 고 작고 섬세한 한 떨기 흰 빛을 켜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을지 고개를 푹 숙인 모습 청초하다. 아주 작은 초롱불을 밝혀 들고 꾸물거리는 뭇 생명들을 일깨우려 봄길을 홀연히 앞서 걷는 듯이 보인다. 살그머니 그 길을 따라서 가면 올 한 해 무탈하게 잘 걸어갈 것만 같다. 줄기와 꽃을 잇는 가느다란 목이 금세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1월 탄생화 설강화는 눈으로 만들어진 꽃임에 틀림없다. 돌아서면 녹고 마는 눈꽃 같은 꽃! 볕이라곤 안 드는 추운 언덕에 기대어 봄을 마중하는 세상에서 제일 작고 순결한 설강화, 네 고결한 정신을 본받고 싶구나..


찬바람에 분연히 일어서는 야생화들에 정신 팔려 사진을 찍다 보니 두 손이 꽁꽁 얼어버렸다. 시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보지만 냉기가 가시지 않는다. 옷을 덕지덕지 껴입은 내 손은 왜 저들만큼 따스하지 못할까.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고 혈액이 순환하는 이 손은 왜 차갑기만 할까. 얇디얇은 꽃잎으로 꽃샘추위와 대항하는 야생화들은 땅속에 무슨 시스템을 갖추었기에 저리 당당한가. 지구 내부 펄펄 끓는 용암과 연결되는 온수 시스템을 공급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야생화들은 신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비밀스러운 신의 메세지를 전달 받은 요정들이 자연을 순환시키기 위하여 지표면 위로 아름다운 꽃으로 탄생하는 건 아닐는지.. 해마다 찾아오는 봄을 새봄이라 부르는 신의 입김이 작용하는 계절의 선두에 서서 고난과 희망, 끈기와 인내, 죽음과 부활, 생명의 신비로움을 기적적으로 펼쳐 보이때문이다. 그리하여 안에 고여있는 사념들과 오래된 습성이 쌓여서 밀어내는 각질들을 벗겨내고 새로이 맞이하는 물결에 기어이 합류할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만발한 꽃들보다는 꽃샘추위와 대항하는 3월 초순 꽃들이 이런 용기를 내는 모습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이제 막 솜털이 다닥다닥 붙은 줄기와 오그린 꽃봉오리들을 내민 노루귀들을 보노라면 얘네들이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일어설까 말까,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넘어질 듯 말 듯, 안간힘을 다하는지 알 수가 있다. 찬 바람 쌩쌩 부는 문 바깥으로 출생하였으나 너무나 시리고 추운 이 세상, 도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들어가는 문은 꽝 닫혔다. 


아가들은 자기네들끼리 소곤소곤 몸을 붙여서 찬 바람을 막아본다. 

우째 살아갈꼬? 쪼금만 견뎌보자. 

너희들은 어디에서 고런 고운 빛깔 천을 장만하였느냐? 내 분홍 스카프는 아웃렛에서 단돈 만 원 주고 샀단다. 노루귀 너희들 꺼가 더 곱구나. 진짜 이쁘다, 이뻐. 조금만 더 기다리렴. 활짝 꽃 피울 날이 곧 다가올 거야. 다음 주 일기예보는 온화하다고 하니까. 포근한 낙엽 이불을 긁어모아서 아가들에게 덮어주었다.


세로 골이 뚜렷이 패인 수석 같은 돌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가진 노루귀 한 가족을 만났다. 

배경이 없는 대부분 아가들은 벌판에 내버려져 사투를 벌이는데 명당을 고른 이 가족은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바람을 막아주니 생육이 빠른 편이라 꽃들이 골고루 잘 피어났다. 누가 일부러 꾸며놓은 수석이 있는 정원 같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든든한 뒷배경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그 행운을 누가 주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없는 행운을 불평하며 살아가기에는 시간이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 그 행운, 내가 만들어서 깃들기도 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 눈에 띄진 않지만 새해 복 여러 개 만들어서 내년 내후년 메아리처럼 내게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언제나 가녀린 야생화들에게서 인생 살아가는 교훈을 얻곤 한다. 

사월에는 내가 직접 그린 프로필 사진 얼레지를 만나러 와야겠다. 봄에 피는 야생화 중에 제일 보고 싶은 꽃 얼레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더더욱 보고 싶다. 칠 년이 걸려 한 번 핀다는 얼레지꽃! 이 꽃을 본다면 귀한 행운이 내게로 찾아올 것만 같다. 






풍년화
설강화
복수초
노루귀
숲은 아직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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