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행복은 멀찍이 두고서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동산 위 빨간 모자를 쓴 집이 그러했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이편에서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집의 안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숨 가쁘게 산을 올라가서 그 집이 잘 보이는 지점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숨을 고르고 시선을 던지는 일은 애정하는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어느 날은 오랜 바라봄을 그치고 호수 건너편 그 집으로 가는 길을 탐색했다.
언덕 꼭대기로 치닫는 길은 여러 갈래 수수께끼 같았다.
오르막길을 타고 쭉 올라가면 만날 것으로 확신했으나 오른편으로 휜 길은 뚝 끊기었다.
다시 내려가서 작은 샛길을 발견하였고 가파른 경사로를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그 길 끝에서 한가하게 자리 잡은 그 집을 발견했을 땐 너무 조바심을 낸 나머지 허탈할 지경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거느린 그 집은 평범한 가정집이 아니었다.
작은 그림 전시실이 딸려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그래서 멀리서도 시선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가벼운 산책 차림으로 처음 갔을 때는 카푸치노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왔었다.
통유리창 너머 서있곤 하던 저편 산길과 호수가 한눈에 내다 뵈는 풍경에 감탄하였고 턱수염 사내가 건네준 커피맛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그리고 다시 오겠노라고 다짐했다.
다음번에는 이 집에 어울리는 근사한 차림새로 식사를 하러 오겠다고...
그 다짐을 지키는 데 몇 년이 걸렸다.
행복을 유예하면서 언젠가는 가고야 말 동산 위 낙원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은 전혀 괴롭지 않았다.
잘 신지 않던 구두를 신는 것 외엔 특별할 것 없는 차림새로 그 집 주차장에 드디어 발을 디뎠다.
평지와 달리 고도가 높은 겨울 하늘은 겨울 바다처럼 새파랬다.
저 아래 내 집 하늘은 딱 잘려나가고 히말라야 오지 하늘이 날아온 듯 생경했다.
거친 바람이 불었고 화강암으로 축대를 쌓아 올린 언덕 위 단풍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며 붉은 물결이 일었다. 그 정점에는 이 언덕의 수호신 같은 백합나무 한 그루 푸른 하늘에 붙박여 흰구름을 걸치고 우뚝 서 있었다.
바람이 펄럭일 때마다 나직한 속삭임을 외는 백합나무는 빨간 집을 지켜주고 이 언덕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 그 노래를 듣는 이들이 마술에 이끌리듯 이 집으로 모여든다.
단란한 가족이 추억이 간절한 연인이 그렇게 홀리듯 찾아온다.
나도 한 해 끝 추억이 되는 순간을 만들기 위해 빨간 구슬이 달린 리스와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실내 돌벽 옆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비정형 돌들이 자리를 꿰맞춘 돌벽이 깊은 산장에 들어온 듯 안온한 느낌을 준다.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고 거친 듯 질서 정연한 이 돌벽에는 벽난로가 어울린다.
차갑고 딱딱한 질감이 불을 품어 녹진하고 따스해진다면 불길을 넣어도 좋으리.
완강한 불길을 허락하는 돌벽의 허용범위는 언제나 엄격하여 장작 한 더미를 삼키고는 칩거한다.
불길이 식으면 돌벽도 식지만 언제든 데워지는 돌벽은 명랑한 편이다.
일전에 턱수염 사내는 보이지 않고 말쑥하고 여리여리한 청년이 주문한 버터문어구이 오징어먹물파스타 해산물토마토리조또와 함께 버섯수프 샐러드 통곡물 빵을 곁들여 서빙해 준다.
버터구이 문어도 연하고 갑오징어 듬뿍 토핑 된 먹물파스타는 짭조름하면서 풍미가 진하다.
조심스럽게 소량씩 돌돌 감아서 먹었건만 보물지도를 감춘 컴컴한 동굴 입구같이 입가에 번진 먹물파스타는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에겐 위험한 음식이 될 수 있다.
식사를 하면서 창 밖 풍경으로 자꾸만 시선이 빼앗긴다.
들어올 때 보니까 출입구 쪽 무거운 토분들이 사나운 바람에 넘어져 있었는데 바람에 저항하는 백합나무는 미동이 없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호수 위 흰구름들이 어디론가 작정하고 급히 흘러간다.
풍경이 좋아서 분위기에 취하다 보니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금세 배가 부르다.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기다렸던 바람이 드세게 분다.
단풍숲은 고즈넉한 가을인데 잔잔한 호수가 일렁이면서 겨울이 오려한다.
계단을 내려와서 레스토랑을 올려다보자 세모꼴 치솟은 지붕이 돛단배처럼 날렵하게 창공 속으로 항해를 떠나려 한다. 저편 산길에서 바라보이던 빨간 지붕은 보이지 않고서 말이다.
갑자기 새빨간 짬뽕 국물이 생각났다.
평지에서는 얼큰한 짬뽕을, 동산 위에 오르면 고상한 파스타를 먹어야겠다.
빨간 지붕 아래 행복을 맛본 날은 가을이 끝나고 한 해도 끝나가는 끝자락 그래서 새로움이 시작되는 모퉁이 같았다. 이 언덕을 내려가면 또다시 설레는 기다림이 시작될 테니까.
새하얀 눈이 쌓여 설경이 유혹하는 날 이 집 전망은 죽여줄 것인데 워낙 경사가 심한 길이라서 접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설경은 절경이 되고 빨간 집은 외톨이가 되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리.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따사로운 불빛이 비치는 그 집은 절해고도(絶海孤島).
절망 속에 움튼 한줄기 희망을 찾는 이에게 등대 불빛이 되어주리.
너도 그러하리.
멀리서 깜박깜박 정겨운 꿈을 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