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미끄럼 타는 낙엽들이 빛바랜 어떤 장면을 어렴풋이 소환한다.
가을걷이 한 곡식이 곳간에 가득 차면 들판 건너 정미소에선 연일 나락 빻는 소리가 분주하게 들려왔다. 부두를 막 출항하는 뱃고동 소리처럼 우렁차게, 붉은 녹이 슨 양철 지붕 아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면서 흰 쌀이 계곡 폭포수같이 쏟아지면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일요일 아침 단잠을 흔들어 깨우는 그 소린 겨울 양식을 포대기에 담는 새하얀 소리였고, 농부들에겐 심장이 뛰는 소리와도 같았다.
정오가 지나자 낮게 드리운 먹구름을 데려온 저기압이 왕겨와 햅쌀을 분리하는 정미소 기계음을 삼키면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마당귀에 겉도는 낙엽을 따라다니며 이리저리 쓸려 다니던 내 눈가에 호기심을 촉발하는 낯선 이들이 등장했다. 도로포장 이전 7번 국도는 완행버스 한 대 지나가면 뽀얀 흙먼지가 일어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감추곤 했다. 집 마당 바로 앞 그 길 위로 처녀 총각이 걸어가는데 무겁게 가라앉은 감정이 그 둘의 걸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여자는 체념한 듯 걸어가고 그런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남자는 애걸하는데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는 여자의 걸음이 한 번씩 크게 흐트러지곤 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꼬마아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여자는 마음이 떠난 것 같았고 남자는 그 상황을 되돌리려 애쓰는 것 같았다.
막차가 이미 떠난 시각 이제 곧 해가 저물 텐데 그들의 겉옷은 얇아 보였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내내 여자는 뿌리치고 남자는 붙잡고 옥신각신 엉켜서 꾸물거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갈 동안 나는 여자가 잘못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지켜보았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 두 사람이 걱정되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밤을 새워 걸어갈 그들의 길이 언제 끝날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우였다.
그들은 헤어졌거나 잘 살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했을 테고 청춘의 연애사 한 편을 찍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어려서 그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해하지 못했다.
눈앞에 강물이 흐른다.
건너기 전에는 막막하고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에 더 두렵기만 하다.
그냥 첨벙첨벙 뛰어들면 되는지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지 건너기 전에는 강물의 수심과 강폭조차 알 길이 없다. 그 강물은 혼자서 건널 수도 둘이서 건널 수도 있다. 행운의 징검돌을 만난다면 혼자서도 잘 건너갈 것이요, 둘이서 건너더라도 호흡이 안 맞으면 넘어지고 만다. 청춘에 가로놓인 거대한 서사시는 희극으로도 읽히고 비극으로도 읽힌다. 희극은 내내 행복한가. 비극은 불행한가. 관통하는 그 순간의 희비는 다를지라도 남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진 않는다. 서로 다르게 읽히는 이야기는 접어둠이 마땅하다.
남녀가 만나서 해피엔드로 귀결되는 동화의 귀납법에 익숙한 아이는 사랑하기에 헤어지는 현실이 수수께끼 같았다. 어린 망막에 그려진 연인의 모습은 슬픔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랑이 다 행복하지만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었다.
순수한 감정으로만 다가서는 블라인드 사랑은 촌스럽게 취급되는 시대.
살아온 형식과 조건이 맞아야만 감정과 눈빛을 교환하는 조건부 사랑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서울에서는 잘 나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내 거주하는 선남선녀 입주민끼리만 가입조건이 주어지고 등록해서 만나는 결혼정보회사가 차려지고 있다고 한다.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문턱의 차이를 없앰으로써 더 믿을 수 있고 더 빨리 가까워지는 촉매제가 가치관의 차이도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최근 큰딸의 졸업작품 전시회가 열려서 다녀왔다.
자정작용하는 물의 회복력과 물결의 부드러운 곡선을 벽면에 조성하고 유리와 메탈 소재에 푸른 색을 입혀 물의 차분한 정서를 표현하였다. 로비 라운지에는 위층에서부터 솟구치는 회오리 형태 물기둥을, 유리천장으로 스며든 자연의 빛을 쬐며 심신의 이완을, 아로마 소일에 조성된 정원을 체험하며 밤과 낮 어둠과 빛을 조율하는 조도를 통해 현대인들의 불면증을 치유하는 수면클리닉 공간을 디자인 한 작품이었다.
1층에는 로비 리셉션, 허브티 디카페인 차를 마시는 쏨카페, 수면을 도와주는 건강기능식품을 파는 스토어, 물방울을 닮은 둥근 벽체에 태블릿 창을 띄워 숙면에 도움을 주는 개인 경험담을 공유하는 셰어 큐어실이 있다. 2층은 진료상담실, 수면 정보를 알려주는 미디어실, 틈새 공간을 흐르는 물결처럼 곡선형으로 만든 책장에 책자를 진열해놓은 북라운지가 있고 3층에는 커다란 수조에 물의 파동을 일으켜 바닥에서 비춰주는 조명이 천장에 물결무늬를 만들고 빗방울과 물소리를 들으면서 휴식하는 명상음실, 북라운지, 맨발로 걷는 흙길을 통해 자연과의 교감을 촉감으로 힐링하는 아로마소일실을 설계하였다. 많은 시간을 투입 수면을 공부하고 복합문화공간을 구현한 딸이 대견스러웠다.
어떤 공간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물, 빛, 흙이 주는 자연치유효과를 창의적으로 설계한 결과물이 돋보였다. 어느새 훌쩍 자라서 눈부신 날개를 달고 비상을 앞둔 딸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섭섭하지만 언젠가는 내 품을 떠나게 되리라.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고 새로운 인생길을 나아가리라. 투명한 무지갯빛 물방울에 가려진 딸의 미래를 응원하였다.
11월 마지막 주에 내리는 가을비가 나뭇가지에 붙은 마지막 나뭇잎을 인정사정없이 데려간다.
한때는 다정했던 나무와 나뭇잎은 이별하는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남은 자도 떠나는 자도 보낼 수밖에 없고 떠날 수밖에 없는 회자정리의 시간.
어릴 때 7번 국도 신작로 길을 흑백필름 신파극처럼 나른하게 걸어가던 두 사람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타이틀 사진_ 딸이 디자인 한 수면치유 클리닉 공간 S.S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