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남연우

많이 지쳐 있었고 손가락이 뻐근하였다.

누군가의 지저분한 뒷모습을 청소하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자동차 앞유리에 빗방울이 맺혔고 저편 하늘은 누런 황금햇살이 비쳐 들었다.

눈가에 내려앉은 그늘을 순식간에 걷어주는 상서로운 빛이었다.

먹구름 인 이편에서 환한 햇살 부자 저편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산 모퉁이를 돌면서 계속해서 눈길을 주는데 어느 순간 지상까지 내려온 무지개 뿌리를 보았다.

오색 빛이 선연한 빛기둥이 풍경을 관통하며 투명하게 내려앉았다.

무지개를 잡으러 가는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다행히 내가 가는 방향으로 나타나서 기다려주는 듯한 빛무리를 따라잡으려고 속도를 높였다.

처음 보았을 때 아웃렛 뒤편에 있었기에 비상등을 켜고 길가에 잠시 섰더니 산너머 멀어졌다.

가던 길을 다시 주행하면서 이제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언덕길에 올라서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 언덕을 내려가자 뒤편에서 따라온 먹구름이 하늘을 평정하더니 햇살을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야속한 무지개는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찬란한 날개를 접기 시작하였다.

지상에서 하늘로 건너가는 오색 다리는 숨 가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쓱해진 무지개 잔상을 북쪽 하늘에 남겨두고 차는 반대편 길을 따라 우회전했다.


납덩이를 매단 심장을 다시 뛰게 해 준 하늘의 선물이 그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다.

어떤 달콤한 말과 음식과 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빛으로 만든 찬란한 꽃송이를 가슴에 품고 나자 악에 대항할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사필귀정에 이르는 자연의 순리에 맡겨보기로 했다.

시름에 잠긴 내게 그 약속을 믿게 해 주려고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건 아닐까.

비가 내린 뒤 햇빛과 공기 중 물방울이 만나 빨간색에서 보라색에 이르는 빛의 내면을 기적처럼 펼쳐 보이듯

나는 무지개 안에서 늘 살고 있었다. 그 빛이 강렬하고 찬란하여 못 알아봤을 뿐이다. 어쩌면 내 눈물방울에 비친 무지개가 나의 구원 아닐까.







낙엽 진 나무에 첫눈이 오기 전 단풍 구경하러 K 대학교에 갔다.

굳이 명산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그곳에 가면 나무가 두 번째 피우는 가을꽃들을 예쁘게 감상할 수 있다.

겨울을 이겨낸 섬세한 봄꽃의 영광으로 한 번, 겨울이 오기 전 단풍 든 나뭇잎으로 한 해 두 번 꽃을 피우는 나무는 지구별에서 가장 축복된 생명체이다. 인간은 생명의 불꽃을 악용하지만 나무는 항상 선의의 불꽃을 소리 없이 덕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마당에 우뚝 선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헤이즐넛라테 커피를 들고 도서관으로 가는 샛길로 접어들자 우람한 팥배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환성을 자아낸다. 그 숲에 깃든 새들 목소린 어찌나 해맑은지 가을숲을 읽고 웅얼거리는 나뭇잎들의 책갈피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하다. 붉게 물든 단풍숲 아래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물듦이란 기꺼이 뛰어내릴 용기를 말한다.

나의 여백을 선뜻 내어주는 일이요.

세상 살아오며 애써 지킨 마지막 백지와 같은 공간을 남겨둠을 말한다.

여백이 없다면 욕망에 찌든 마음은 어떤 대상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침범한다.

물듦이란 얼마나 겸허한 수용인가.


아름다운 마무리로 떠난 흔적은 떨켜라는 여운이 남는다.

단풍은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다.

잎의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숨어 있던 안토시아닌(빨강, 보라)과 카로티노이드(노랑, 주황) 색상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물듦이란 내 안에 있던 나도 모르는 어떤 빛깔이 때에 이르러 의식 위로 올라오는 현상이다. 물방울을 만난 빛이 무지개를 그려내는 원리와 같은 것 아닐까.


완벽하게 칠하지 못한 여백과 미처 모르는 그림자 뒤에 무지개가 숨어 있다.

숨어 있던 빛깔을 꺼내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물듦이어라.

가을에 이르러 미처 드러내지 못한 나의 빛깔을 숨기고 살아왔다.

그 빛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뒤척이는데 나는 그 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그래서 더 경직되고 더 힘들었다.

이젠 훨훨 자유로워지고 싶다.


인생 중년 깊어가는 가을,

무엇이 두려워 뛰어내릴 용기를 머뭇거리는가.

뛰어내려봤자 맨땅에 헤딩하는 것 아니잖은가.

바람에 홀연히 실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내가 착지하고 싶은 양지에 살풋 내리면 그만 아닌가.

뒤늦게 핀 샛노란 민들레꽃 위에 내려앉아 추위를 덮는 이불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미덕 아닌가.


늦가을 저녁 어디선가 낙엽더미 태우는 내음이 난다.

한해살이 짧은 생의 못다 한 이야기를 태우는 연기는 경건하다.

어깨 위에 숄을 두른 여인은 기다란 막대기로 불티가 날리지 않게 긁어 모으는 일에 열중한다.

하찮은 나뭇잎이라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 누구보다 열심히 비바람에 맞서 살아왔다.

성실하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열매 안에는 내생을 위한 씨앗이 들어있으니 후회 없노라.

마지막 뒷모습을 불사르는 의식을 지켜보던 석양마저 검게 기운다.

여인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때맞추어 겨울이 도착했다.

나무가 부르는 노래는 계속된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주워서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단풍숲 아래 한참 동안 앉아서 물들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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