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답

_저녁 무렵

by 남연우

올해 가을은 비구름을 타고 오는지 통 푸른 하늘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름 장마보다 가을장마 강수량이 더 많다고 하니 한 번도 겪지 못한 이상기후가 심드렁하다.

예년 같으면 설악산에서 시작된 단풍이 남쪽으로 울긋불긋 가을산을 한창 물들일 텐데 빗물에 시달린 나뭇잎들이 단풍을 건너뛰고는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떨어진다. 맨날 우중충한 날씨가 겨울로 곧장 직행한다는 유럽 날씨를 닮아가고 있다. 돌려다오, 자랑스러운 시월의 공활하고 파란 하늘을.


종일 저기압에 짓눌려 은둔자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희미한 빛을 수거하는 태양이 서쪽으로 기운다.

잡곡과 검정콩이 들어간 쌀을 물에 불려두고는 황급히 버킷햇을 쓰고 청자켓을 걸쳤다.

한기가 들어 무거운 머리를 비워낼 겸 스카프도 친친 감았다.

나의 길동무가 되어 줄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And yes, I know how lonely life can be

The shadows follow me

And the night won't set me free

But I don't let the evening get me down

Now that you're around me"



감미로운 음악을 따라 도로 위 차들은 빙판을 달리듯 무소음 미끄럽게 굴러가고 엷은 그림자를 데리고 가는 발걸음마저 타박타박 숨을 죽인다. 오로지 음악과 나 그리고 한줄기 길이 어둠이 번지는 이 저녁 위로 놓여 있다. 혼자 걷는 것은 얼마나 완벽한 하모니인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다가서는 세상의 풍경들이 때로는 생경하게, 때로는 무심히, 특별한 기쁨으로 시시각각 스쳐 지나가며 잔상을 남긴다.


유모차에 타고서 조그만 발을 내밀어 꼼지락거리던 아이들은 훌쩍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인생길을 모색한다. 그 궂은 세월 온몸으로 부딪히며 뒤치다꺼리하던 나는 아직 약간의 사슬로 얽매여있지만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다.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나만의 길이 다시 생겼다. 지금 놓인 이 길은 곁가지가 다듬어져 좀 더 매끈하고 덜 굽어져 있으며 여정이 분명한 길이다. 숨 가쁘게 노력해야 되는 옹이진 길이 아니다.


그런데 약간의 당혹감을 가지고 이 길을 바라본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길은 옅은 안개에 가려져 저 멀리 놓여있고 새로운 용기와 모험을 주문한다.

주머니를 뒤적여 보니 이어 버즈 케이스 말고는 쓸 만한 용기가 남아있질 않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십 대의 내 젊은 용기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서슬 퍼런 용기 말고 이제는 닳고 닳아서 뭉툭해져 버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도 못하는 그 부드러움도 용기가 된다면 기꺼이 꺼내 쓰고 싶다.


성공과 실패 이분법의 낡은 공식도 무용지물인...

자체 동력 바삐 흐르는 시간 앞에 무릎 꿇고서 더 여물고 더 농익고 싶을 뿐이다.

담벼락 아래 기우는 가을빛을 소중하게 끌어모은 금잔화처럼.

비가 내리 오거나 말거나 이웃 텃밭 배추는 알이 배어 둥글게 벌어졌고 녹색 짙은 무청은 쑥쑥 자라 오른 무를 땅 밖으로 밀어내며 서리 맞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과 마가목 나무가 서 있는 산책길로 가기에는 해가 이미 지고 있다.

불은 저녁 쌀을 안쳐서 고슬고슬 밥을 지어야 한다.

집 방향으로 발길을 꺾었다.

보도는 급격히 비좁아져 폭이 50cm 채 되지 않는다. 맞은편 보도는 없고 한 사람 지나가면 꽉 차는 외길이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끼고 있는 이 길은 지난여름부터 불법주정차 단속 때문인지 중앙차선에 도로봉을 박음으로써 차들이 옆으로 지나가면 위협을 느낀다. 주택과 주택 사이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로라서 한 개 차선 도로 폭이 아주 비좁다. SUV 차들이 지나갈 땐 속도를 늦추어 간신히 지나가는 실정이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는 산책길 자주 애용하는데 이전보다 사정이 더 나빠졌다.

이 길 주소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해당구청 도로과 민원 접수창에 들어가니 국가전산망 화재로 오프라인 접수하라고 되어있었다.

전화를 붙잡고 어느 공무원에게 얘기하면 자기는 담당자가 아니니 다른 사람을 바꿔주었다.

그 사람에게 얘기하면 자기 부서가 아니니 해당 부서 교통과로 전화를 돌렸다.

또 얘기하면 담당자가 지금 조퇴하였다며 전해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네 사람에게 반복된 얘기를 하였고 피드백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이틀 뒤 전화 주겠다고 하였다.

전화가 없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가 오늘 교육 들어갔다며 다음 주에 출근한다고 한다.

그 담당자 공무원은 자기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내가 내는 지방세가 내가 다니는 길에 위험을 느끼지 않도록 시정되는 일에 쓰이기를 당부드린다.


일대일 오프라인 민원접수로 해결이 안 된다면 찍어놓은 사진을 첨부해서 온라인 접수가 시작되는 날 다시 신청하겠다. 차들은 돌아가도 길이 많고 빨리 가지만 보행인은 이 길이 아니면 많이 우회해야 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생긴 그대로 이 길을 걸어 다닐 것이기에.

이런 용기는 용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용기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시민의식에 따른 책임이니까.

나는 지금 새로운 나만의 길을 개척할 용기가 필요하다.

서부개척시대 대륙을 횡단하는 그런 용기 말고 새로운 물을 받는 아주 작은 용기면 된다.





저녁답

_작자미상



저녁답

노을이 흔들리면

홀로 나서라


책도 아예 덮어두고

멀어져 간 사람도

다시 올 기쁨도


한가닥

상념마저 다 지우고

터벅터벅 오솔길

홀로 걸어라


저녁답

노을이 가라앉거든

데운 가슴

하나만 챙겨 오거라






베란다에 핀 나도샤프란

가을에 피는 취나물 꽃




** 타이틀 사진은 지난달 저녁 무렵 석양에 물든 배롱나무 꽃이 추파를 던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꿈을 꾸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