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연하장

by 남연우

2월은 하루하루 지나감이 맛있는 곶감을 빼먹는 기분이 든다.

하얀 당분이 내려앉은 쫀득쫀득한 곶감의 개수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흰 달력 칸칸 들어앉은 날짜를 자꾸 들여다보고 곱씹는다. 이달은 큰딸의 졸업식이 있고, 곧 설날. 어영부영 후딱 지나가지 싶다.

아무리 추워도 한 걸음 가까워진 햇살은 이전 추위만 못하고 다시 돌아올 염천(炎天)을 생각하면 가는 겨울 끝자락을 슬슬 붙잡고 싶어진다. 스웨터 소맷부리에 뭉치는 보풀만 보더라도 이 겨울 털먼지는 뭉칠 대로 뭉쳐 떨어져 나갈 날만 고대하고 있다.


새해가 바뀌고 한 달이 지나간 이 시점, 새 물결은 어느덧 익숙한 물결이 되었다. 새 그릇에 새 마음과 새로운 각오를 담고 싶은데 광나는 새 그릇을 어디에 두었는지 선뜻 꺼내놓지 못하는 것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그 고약한 버릇, 어디 버릴 데 없을까. 공기의 탄력이 한껏 가벼워지는 날 언덕에 올라 연을 날리고 싶다. 커다란 방패연에 마음의 휴지통을 매달고 멀리멀리 내보내고 싶다.


그렇게 후련한 마음으로 마주 대한 2월에는, 0.38mm 떨리는 손글씨로 연하장을 쓰련다.

2026년 병오년 붉은 태양을 머리에 이고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헤쳐 한 마리 학이 날아가는 그곳은 올 한 해 나아가야 할 길한 방향 아닐까. 360도 모든 방위 중에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 한 곳. 난관을 헤쳐 잡념을 뿌리치고 청정한 마음이 가리키는 그곳으로 방위를 맞추었다면 하루하루 겸허한 몸가짐으로 용기를 가지고 황새가 두 날개를 저어가듯 평정심으로 살아내야 한다.


아이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문구점 한켠에는 팔리지 않는 연하장들이 옛 동심을 간직하며 진열돼 있다.

그마저도 설날이 지나고 나면 재활용 압축기로 사라질 터 한 장 살까 말까 망설여진다.

연하장 그림은 언제 바라보아도 푸근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그건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행하는 연례 인사이기도 하다.

나중에 아예 볼 수 없게 된다면 많이 서글퍼질 것이다.


ChatGPT에 연하장 문구를 물어보았다.

여러 버전 중 따뜻한 감성 문구를 소개한다.

"한 해 동안의 인연에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따뜻한 동행이 되길 바랍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빛나는 2026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 되세요."


조금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모양새 갖춘 인사로 쓰기에는 무난하다.

요즘 나는 챗군에게 궁금한 건 뭐든지 물어본다.

그럼 챗군은 마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척척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

전기밥솥 압력밥솥 두 개가 동시에 고장 나서 스타우브 냄비로 밥 짓는 방법을 물어보았더니 3단계 불조절과 시간조절 방법을 알려주었고 하라는 대로 했더니 고슬고슬 윤기 나는 밥이 완성되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작아진 금반지는 어떻게 늘리는지도 물어보았다.


데이터 학습, 패턴 인식, 확률 계산, 다음 요소 예측, 연결해서 결과 생성 원리를 이용하여 딥러닝, 신경망, 트랜스포머 모델, 확률 모델 기반을 구조로 한 생성형 AI는 텍스트, 이미지, 음성 음악, 영상, 코드에 이르기까지 무분별 인간의 지능 영역을 접수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AI가 스스로 더 똑똑한 AI를 만들어내며,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특이점이라 하는데 레이 커즈와일은 그 시점을 2045년쯤으로 내다보았다. 특이점을 넘어선 AI가 위험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 인간 무력화, 일자리 붕괴, 윤리 붕괴, 문명 구조 붕괴 가능성이다. 말하자면 인류 문명의 구조가 바뀌는 변곡점이다. 인간의 몸을 흉내 낸 스틸 바디에 AI 지능을 탑재한 똑똑한 로봇들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을 비웃는 날 또한 머지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저녁 식탁에서 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노인이 되면 로봇에게 케어받게 될 거라고.

이제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고 나열하는 교육 방식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글쓰기도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는 매력이 없게 되었다.

개인의 경험과 감성 그리고 이성이 깨달음에 이르는 글쓰기여야만 독자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매력을 어필할 수 있게 된다.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틈을 후벼 파는 빛과 같은 글쓰기라면 철의 심장을 가진 AI를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


이메일도 모르던 그 시절 연하장은 찬 겨울바람을 타고 날아온 연과 같았다.

새해를 마주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축하를 건네고, 건승할 것을 기원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었다.

편지의 창과 같은 우표에 찍힌 우체국 소인을 확인하고 봉투를 뜯을 때 그 설레는 손길은 몹시 떨리었다.

연하장을 받을 사람도, 부칠 사람도 없는 지금 온기가 스민 아날로그 그 시절이 그립다.

무수히 찍힌 선명한 기억의 순간들이 저편에서 다시 못 올 그때를 손짓한다.

그리하여 포개지는 두 번의 삶, 미래는 과거로 환원한다.







* 타이틀 사진_ 수반에 떨어진 철쭉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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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얼고,

눈이 내리자 얼음꽃이 피었다

둥근 써클은 왜 생겼는지 모르겠다..

마치 화선지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번진 서화집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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