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네 잎 클로버를 닮은 열쇠가 있었다.
네 개의 잎사귀는 희망, 사랑, 믿음, 양심을 상징하였다.
열쇠 이름은 클로버, 네 가지 심성을 모두 갖춘 이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저절로 마음이 열리면서 금빛 나는 행운을 나눠주는 열쇠였다.
클로버는 발이 아주 빠르게 자체 동력으로 움직였다.
시간의 페이지를 파도처럼 넘나드는 신기한 클로버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 당도하였다.
성수동 핫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점심시간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서서 담소를 나누었다.
클로버는 푸릇푸릇 땅거죽을 뚫고 나온 새싹들 속에 숨어서 그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보아하니 천만 관객을 돌파한 왕사남 영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단종과 엄흥도의 스토리에만 집중할 뿐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조와 한명회 얘기는 비켜갔다.
커피를 훌쩍거리며 가볍게 소비하기 좋은 엄흥도의 맛깔난 연기를 얘기하였으나 유배지 청령포에 서린 단종의 비애를 풀어내기에는 점심시간이 짧아 보였고, 빌딩 유리창에 미끄러지는 화창한 봄 햇살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일렬 직관한다는 묘지는 손가락질하면서 권모술수에 능한 한명회 같은 자들이 지금도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클로버는 젊은이들의 눈빛과 인상착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연푸른 희망과 풋내 나는 사랑은 미숙하였고, 믿음과 양심은 덜 자란 티가 팍팍 났다.
새싹들이 다치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유모차를 밀고 가던 아기 엄마가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대한민국 출산율 0.8 기록을 깨고 나온 귀한 아기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말간 아침 해님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달큼한 젖내 나는 탱글탱글 눈코입 하늘이 빚어 준 순백의 얼굴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말을 알아듣기 이전 잠시 허용된 이 시간이 아기에게는 가장 무결한 순간 아닐까.
엄마엄마 잼잼 도리도리 하다가 하나, 둘, 숫자를 세면서 인간의 욕망이 아기에게 옮아간다.
젖니가 나면서 맛을 구별하고 아기는 음식 투정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클로버는 희망, 사랑, 믿음, 양심을 아기에게 아낌없이 주는 엄마의 마음이 자신과 꼭 들어맞음을 알고서 반짝반짝 빛나는 행운을 떼어서 나눠주었다. 그 행운은 훗날, 아기가 자라서 꼭 필요한 때에 짜잔 나타날 것이다.
솥뚜껑을 뒤집어 전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출출해진 클로버는 시장통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에 좌판을 펼쳐놓고 나물을 파는 할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부지런한 할머니는 냉이 달래 쪽파 어린 해쑥을 다듬고 계셨다.
때마침 지나가던 여자가 냉이값을 물었다.
한 바구니 오천 원이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현금이 없는 여자는 할머니에게 계좌번호를 물었다.
남들은 골판지에 매직으로 크게 적어놓은 계좌번호가 할머니에겐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모른다고만 했다.
여자는 휑하니 가버렸다.
야속한 봄볕에 팔리지 않는 나물이 비실비실 말라가자 할머니도 조바심이 났다.
쪽파를 다듬는 손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쪽 국수가게 뜨거운 국물이 훈김을 내뿜었다.
건너편 막걸리 술빵가게는 TV 출연 광고 때문인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클로버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재주는 있지만 계산을 치르고 음식을 배달하는 재주는 없었다.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가방을 열어 차갑게 식은 주먹밥을 꺼내 잡숫고 계셨다.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져 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할머니는 옛날 사람들이 그려진 돈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지 못했다. 요즘 사람들이 툭하면 꺼내는 플라스틱 쪼가리에 무슨 돈이 담겨있는지 그 영문도 알지 못했다.
쌈지 주머니에 꼬깃꼬깃 들어가는 지폐 몇 장과 걸을 때마다 짤랑짤랑 동전 부딪는 소리, 그 소리에 굽었던 허리가 쭉 펴지곤 했다.
오늘은 다 틀렸다.
시들시들한 나물을 보자기에 쓸어 담은 등짐을 메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할머니가 해거름 고갯길 구부정하게 넘어간다. 희미해진 희망을 끌어안고 아직도 굳센 믿음과 사랑 그리고 꿋꿋한 양심을 지닌 할머니의 마음속으로 클로버는 행운을 힘껏 불어넣었다. 그 행운은 조만간 어느 인심 좋은 여사님의 발길을 할머니 앞으로 데려가서 할머니 나물이 다 팔리게 할 것이다.
한 여자가 카페 화단에 핀 매화 향을 맡고 있었다.
매화 한 가지에도 한 구간의 향기가 있다는데 지금 여자는 어느 인생 구간을 지나고 있는 걸까.
코 끝을 파고드는 향기에 취한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노란 꽃봉오리를 내민 수선화를 내려다보고 송송 돋은 돌나물의 귀여운 생김새를 사진 찍었다.
지난해 겨울부터 질질 끌어온 하나의 고민이 해결되어 평온해 보였으나 미완의 찜찜함이 여자 얼굴에 잔여물처럼 남아있었다. 오전에 봄비 내리는 길을 서둘러 나온 여자는 고리에 끼워져 주렁주렁 달린 열쇠 꾸러미를 어떤 아파트 경비실에 맡겼다.
그 열쇠 꾸러미는 몇 달 전 이사 나간 세입자가 그 이전 살았던 아파트 열쇠인데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여자에게 넘어왔다. 여자의 아파트 열쇠 꾸러미는 바꿔치기하여 또다시 가져갔다.
재활용도 되지 않는 쇠붙이들을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여자는 그렇게 빗속을 달려 열쇠를 맡겼고 그 주인은 사 년 만에 자기 집 열쇠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기다란 육면체 플라스틱 손잡이에 이제는 쓸모 없어진 열쇠들이지만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가 적힌 집주인의 권리를 상징하는 물건을 돌려받지 못한 심정을 잘 알기에... 집으로 가기 전 호숫가 카페에 들른 여자는 어느새 성큼 다가선 봄의 향기를 맡고는 정신이 아득하였다. 난간에 가로막힌 허공살림 살면서 땅을 밟지 못한 자책이었다.
매 순간 약 70ml 혈액을 박출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 숨 쉬게 하는 심장은 양심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요즘 그 그릇에 구멍 뚫린 사람들이 많다.
심장 판막 결손도 없는데 양심이 줄줄 새서 팔아먹는 사람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려는 걸까.
100미터를 10초대 달리는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곧 우사인 볼트 기록을 갈아치울 거라는데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면서 점점 인정이 메마르고 기계화되어 가는 사람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라 기계의 편리함에 길든 나머지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맞바꾸는 불편한 거래 아닐까.
클로버는 열쇠를 잃어버린 여자의 헛헛한 마음이 자신과 딱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아날로그 내 열쇠에 꼭 들어맞는 마음을 가진 것 같아.
약해지는 희망을 놓치지는 마.
클로버는 남아있는 금빛 행운을 여자에게도 주었다.
여자는 알까.
인류가 양심을 탈탈 털어먹는 미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새봄을 여는 열쇠도 놓치게 된다는 것을.
봄을 잃어버린 지구별은 둠스데이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란 것을.
상상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친 클로버는 자신은 절대 그 시간으로는 여행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카페 언덕을 내려온 여자는 젖은 흙을 막 밀치고 나온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을 깜짝 놀라 지켜보았다. 저 한 걸음, 한 걸음 느리더라도 힘차게 내딛는 두꺼비처럼 슴벅슴벅 눈 뜬 봄이 여자에게 스며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봄,
봄이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