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역이 있는 솔숲 너머 그 바다는 언제 찾아가도 갈매기와 나뿐이다.
둥둥 뜬 등대 앞 모래사장은 바다 쪽으로 완만하게 뻗어나가 작은 곶을 형성한다.
그곳에 서면 바다가 이 모래곶을 중심으로 양갈래 휘어져 보인다.
드센 봄바람을 즐기는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노래 부르는 수평선 앞에 서면 파도같이 촐랑대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건 걷는 족족 발자취를 남기는 모래 해변이 순수한 환영의 덧옷을 입히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흐르며 세상과 사원을 적시는 강물이 아름답다지만 사파이어 블루 바다만큼 아름다우랴.
도시에서 묻은 땟자국 이 바다에 서면 클린 시스템이 가동 먼지 하나 없이 다 털어주고 물결무늬 해풍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들 다 비워준다. 파도를 따라 무심히 걷던 어느 순간 흰 파도에 검은 무엇이 들어있었다. 밀물 파도는 그걸 자꾸 주려고 손을 내미는데 썰물에 떠밀려 놓치고 만다. 막 출발하는 버스 창문을 열고 누군가 황급히 건네주는 물건을 받으려 애쓰듯이 신발 앞코를 적시면서 팔을 쭉 뻗어 냉큼 받아냈다. 부들부들 기다란 갈퀴 모양 돌미역이었다.
바위에 붙어 자라기 시작한 부드러운 햇미역들이 파도에 못 이겨 떠밀려 다녔다. 어떤 것들은 모래에 푹 파묻혀 있었다. 무슨 보물을 캐내듯 그걸 잡아당겨 긴 머리를 헹구듯 바닷물에 모래알을 말끔히 헹궜다. 자체 염분 반건조된 미역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물미역을 양손에 주렁주렁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송림을 걷던 사람들의 힐끔힐끔 곁눈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바다가 내어준 선물이 자랑스럽다.
뾰족한 솔 우듬지를 거쳐 한풀 꺾인 봄바람 성정이 파릇파릇 보리밭에 내려앉았다.
보리순을 흔들며 나긋나긋해진 바람이 수양버들에 반짝이는 봄빛을 흔들며 지나간다.
문득 어릴 적 그림이 겹쳐 떠오른다.
고향 동산에 보리밭이 있었다.
이 무렵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아낙들이 호미로 보리밭을 매고 있었다.
작은 시인의 눈이었을까.
미세한 훈풍이 보리순을 살살 흔들며 지나가는 광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었다.
그 바람은 아이의 단발머리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달콤한 막대사탕을 문 것처럼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
나즈막한 동산, 봄을 타는 아낙네들, 푸른 보리밭,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내 영원한 봄날의 첫인상은 이 봄 보리밭을 보며 단발머리 소녀로 되돌아가는 마법을 부린다. 나중에 백발의 노인이 될지라도... 시간은 어떤 공간에 담긴 기억에 의해 굽이치는 곡선의 메아리를 들려준다. 공간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자가 시간 부자인 것을. 행복한 추억 부자가 진짜 부자이다.
잠결에 빗소리가 거세다.
못 박아놓은 서까래 틈을 비집고 장작더미를 덮어놓은 비닐을 들썩이며 마당 아궁이 연통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흔들리는 것들은 죄다 흔들며 비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불면증을 다스리던 ASMR 빗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야생의 음질이 폭풍의 언덕 오두막으로 데려간다.
바깥에서 누군가 나를 큰소리로 부르는 것 같았고, 나는 나가기 싫다며 발가락에 힘을 주며 몸을 웅크렸다.
비바람과 자의식이 꿈길을 서로 밀당하며 침수된 빗물을 헤쳐 갑자기 영롱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가 잠시 멈추고 사계 중 '봄' 1악장이 맑고 고운 새들의 리허설로 연주가 시작되면서 잠귀를 가만히 열었다. 새벽녘 일찍 일어난 얼리버드들이 창문 가까운 처마에서 비를 피해 지저귀는 소리였다.
전날 머리가 하얀 할미새들이 신록을 오가며 전선 위에 노니는 모습을 보았다.
올해 제비 둥지는 비워져 허전하였는데 개체수가 많이 늘어난 할미새들이 그 헛헛함을 채워주었다. 머리를 적신 새들이 빗방울을 털며 날개를 비비는 모습이 그려진다. 인적 없는 새벽의 고요를 즐길 줄 아는 새들은 영민한 족속이다.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새들이 찾아왔다. 소리가 다르다. 두 종류의 새들이 번갈아가며 처마 아래 비를 피할 만큼 봄비는 거칠게 내렸다.
아침에 커튼을 열어젖혔더니 밤새 요란한 빗소리와 새소리가 선명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창문이 한 뼘 반 너비 열려 있었다. 덕분에 자연이 연주하는 생생한 힐링 음악을 로얄석에 누워 감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구글 번역이 필요 없는 자연의 소리는 먼 우주의 호흡. 가장 심오한, 가장 깨끗한, 제일 멀리 가는 음성을 들으며 고막에 쌓인 찌꺼기를 밤새 비워냈다.
미나리전을 부치려고 길섬한 미나리 한 단을 샀다.
논머리에 돌미나리가 자라기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
해마다 오월이 되면 엄마는 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가서 미나리를 베 주었다. 논두렁에 앉아서 바구니 수북이 받곤 했던 터라 일러도 너무 일러 기대를 접었다. 혹시 몰라 밭두렁 돌나물을 뜯어 오는 길에 도랑가로 내려가 보았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도랑물이 넘실거렸다.
그런데 초록초록 머릿결 풀어헤친 미나리들이 수면 아래 물길 따라 그득하였다.
눈을 씻고 봐도 그대로, 횡재수는 이런 것이다.
도랑을 에워싼 콘크리트 제방이 바람을 막아주어 생육환경이 빠른 것 같다.
그걸 베어다가 부침개를 굽고 향긋한 나물을 무쳤다.
얼었다 녹았다 겨울을 이겨낸 진흙이 품고 있던 생명의 발아 그 신비로운 봄밤이 키워낸 미나리 향은 비닐하우스 재배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푸릇한 물 내음과 봄바람 냄새가 미나리에 묻어났다.
물과 바람의 합작품 미나리는 메마른 화기를 잠재우고 간에 쌓인 독을 해독해 주는 훌륭한 식재료이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천의무봉 소맷자락 안에 숨겨 내려주신 신비의 약초 아닐까.
"미나리는 겨울밤 자고도 돋는 밤
단풍나무 숲 속에 영희 우는 밤
하늘나라 선녀들이 노래하는 밤"
여기까지만 생각나는 어릴 적 자주 부르던 동요를 흥얼거린다.
이 노래를 유독 겨울에 자주 부르면서 봄을 기다렸다.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며 이 노래를 부를 때 저쪽 산기슭 대숲에서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가 들려오면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 밤 영희가 우는 붉은 단풍나무 숲 속을 생각하면 무서웠다. 철창에 갇힌 영희가 생각났고 불쌍한 영희가 미나리가 돋는 봄을 기다리며 기운 차리길 빌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겪은 소녀들의 구전동요 같은데 여러 경로 찾아봐도 이 노래의 전곡 가사를 찾을 수가 없다. 내 유년의 봄을 내내 따라다닌 미나리는 보리밭에서 키가 잘 자랐다. 보리가 쑥쑥 크면 햇빛을 받으려고 발돋움하여 그랬을 것이다. 햇볕을 골고루 받고 영양이 풍부한 양지의 양육환경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미나리에 붙은 아주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 집까지 딸려왔다.
부서질 것 같은 한 겹 미색 지붕을 이고 아이스박스에 담겨 살아남은 달팽이를 용기에 옮겨 물을 주자 더듬이를 꺼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추잎에 얹어 시원한 공기가 통하는 베란다에 내놓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한다. 아파트 정원에 내놓기에는 일교차가 크고 조금 더 자란 뒤 풀잎 위에서 자신의 길을 가게 할 생각이다. 느리지만 더듬이를 더듬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읽고 한뜻 한길 그 길에서 짝을 만나 자손을 낳고 번성하기를...
한낮에 보는 벚꽃은 천국, 밤에 보는 벚꽃은 천당.
음.. 같은 말인데 밤 벚꽃이 더 그윽하다.
보름을 이틀 지난 만월이 개기월식도 아닌데 블러드문.
어둠을 꼬깃꼬깃 접어 환한 달빛으로 피어난 벚꽃 사이로 달을 띄워놓고 감상한다.
구름에 가려 모습을 바꿔가며 벚꽃에 파묻혀 나타났다 사라지는 달과의 숨바꼭질을 한다.
서쪽 하늘 별들이 별빛을 깜박깜박 상향등을 비추며 달빛과의 거리를 조정한다.
서로의 빛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게...
저지대 들판에선 때 이른 개구리 울음소리 개굴개굴.
지난밤 북소리를 두드리며 내리 꽂힌 폭우에도 벚꽃들은 무사하였다.
아직 덜 핀 꽃송이들의 개화를 살짝 부추기기만 했다.
봄꽃 개화기가 점점 빨라져 보름달과 벚꽃이 만난 봄은 이색적이다.
이태 전 아버지를 보내드린 봄에도 이 벚꽃 핀 밤길을 걸었었다.
그 밤 나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보면서 불길함을 느꼈었다.
고향 집 지붕 바로 위에 국자 모양 내려앉은 꼬리별이 아버지를 데려갈 것 같은 예감이...
휠체어에 아버지를 모시고 성류굴 왕벚꽃길을 걸으면서 그 꽃길이 아버지와 마지막이 될 거라곤 감히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셨을까. 그 길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걷는 꽃길임을.
해마다 돌아오는 봄은 어여쁜 꽃들을 고이 데려오는데 한 번 떠난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저 먼 별빛에 대고 아버지 소식을 묻는다.
아버지, 어느 별나라에 계신가요?
저 수많은 별들 중에 주파수가 잘 맞는 깊고 푸른 단 하나의 별을 찾아본다.
이 세상 수많은 길들 중에 보이지 않는 단 하나 진리의 길을 찾아가신 아버지를 따라서 나도 그 길을 좇는다.
부모자식 육신의 인연줄은 끊어졌으나 아버지가 남겨주신 생명의 줄, 빛줄기는 여전히 가슴속에 연결되어 살아갈 방향을 짚어준다. 다음 천리포수목원에 가면 붉은 빛이 도는 불칸 목련 묘목을 사서 아버지 곁에 심어드려야겠다. 언젠가는 나도 그 곁에 엎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