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릿내 나는 광풍을 맞고도 궁의 기왓장은 근엄하고 말쑥했다.
루미놀 반응에 얼룩덜룩 푸른 형광빛을 내는 혈흔은 손이 잰 궁녀들에 의해 재빨리 지워졌지만 눈물 같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드므의 시간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새로운 권력의 서열에 빌붙어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용마루에 걸터앉은 달빛이 자시를 넘어가는 시각 침방나인 자경은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수놓기에 열중하였다. 달포 앞으로 다가온 혼례에 쓰일 활옷을 붙잡고 모란꽃을 수놓느라 바늘에 찔리기도 여러 번 요놈의 바늘은 무슨 눈이라도 달린 건지 딴생각을 했다가는 용케 알아차리고 검지를 따끔하게 찔러댔다.
붉은 핏방울을 연신 닦아내며 성 밖 홀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입춘을 사흘 앞둔 올겨울 마지막 눈이 궁궐 담장 위로 소복소복 쌓인 밤, 그런 밤에는 어둠이 희석되어 바느질이 손쉬웠다. 만백성의 존엄 왕이 기거하는 궐이라지만 눈 내리는 밤은 사방이 고요에 파묻혀 시공의 분별이 사라지고, 자경은 아무도 걷지 않은 이른 새벽 뽀드득뽀드득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걷는 걸 좋아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의 세상이요, 온전한 기쁨이었다. 흰 눈꽃을 입은 자두나무에 다가가서 오얏꽃이 피는 봄밤을 기대하였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의 즐거움은 소박한 자연과의 내통뿐이었다.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글눈을 익힌 자경은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깊은 산속 샘물처럼 맑은 눈빛이 총명하게 내비쳤고 굳게 다문 입은 샘물에 갇힌 바위를 숨기듯 단단한 의지가 서려있었다. 지금은 침방나인으로 금실을 누비지만 언젠가는 서책을 관리하는 규장각으로 가서 책을 보는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전부였다. 지존이신 용안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자경의 꿈은 이토록 소박한 것이었다.
기다리던 오얏꽃이 봉긋 명주빛깔 꽃봉오리를 부풀리던 어느 날 자경은 북촌 정경부인 댁에 심부름을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심부름을 마치고 오는 길에는 사가에 들러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다.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며 어머니 뵙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 자경의 마음은 무지갯빛 비눗방울에 올라탄 듯 둥둥 떠다녔다. 그간 바느질하고 남은 자투리천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둔 조각보, 방석, 베갯잇을 보자기에 쌌다. 정화수를 떠놓고 딸이 있는 궁을 향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어머니 선물이었다.
쓰개치마를 둘러 쓴 자경은 바지런히 걸음을 옮겨 정경부인 댁으로 갔다.
심부름을 마친 자경은 어머니가 사시는 남산 아랫마을로 넘실넘실 가는 길에 풍악 소리가 들리는 장터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남사당패 한 무리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자경도 사람들을 헤쳐 모처럼 만난 구경거리에 눈이 반짝거렸다. 곧 외줄 타기 공연이 펼쳐질 모양이었다. 풍물패들이 연주하는 꽹과리 장구 징 북소리에 열기가 고조되면서 초립모를 쓴 어떤 광대가 단번에 공중에 턱 하니 걸쳐진 외줄 위로 올라탔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든 그가 아찔아찔 한 걸음을 흔들리는 줄 위로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자경의 손에도 식은땀이 배어났다.
어쩌면 그가 고공 위로 누비는 외길은 우리 인생길과 닮지 않았던가.
여러 갈래 수많은 길이 놓여있는 듯 보이나 자신이 선택하는 단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네 인생길.
이미 지난 어제는 등 뒤에 놓고 알지 못해 불안한 미래는 안개에 잠겨 저만치 놓여있다.
그 사이로 서 있는 오늘 그리고 지금 내가 딛는 이 한 발 외 사방은 급류가 흘러넘쳐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지금까지 걸어온 대로 그 연장선을 점선으로 이어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징검돌을 저 광대는 조심조심 내딛는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너무 나대다가는 나가떨어지고, 안절부절 소심하다가는 한 발도 못 딛고 멈추고야 만다. 자신의 그릇 안에서 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신중하고 언행을 조심할 것. 자경은 작고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비수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외줄 타기 광대는 줄을 건너가던 중간쯤에 멈춰 서서 '봄날은 간다'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면서 잠시 자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애절하면서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한 줄기 불꽃같았다. 그 눈길에 한순간 몸이 얼어붙은 자경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심장이 요동쳤으나 이상하게 피하고 싶지 않은 눈길이었다. 저 높은 곳에 선 그는 자경의 고운 미색을 알아보았고 그 눈부신 봄도 누군가에게 선택당하지 않는다면 곧 사그라들 한순간이었다.
자경은 보자기를 꽉 움켜쥔 채 돌아섰다.
그가 줄에서 내려오기 전에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그가 따라올 것만 같았다.
인파 속으로 뛰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도착한 곳은 성문 근처 뒤돌아보니 땔감을 진 지게꾼이 걸어오고 있었고 봄나물을 광주리에 인 노파가 보였다. 성벽에 머리를 박은 아이들은 말타기 놀이에 시끌벅적하였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십 년 감수한 듯 서늘한 번갯불이 자경의 가슴을 내리치고 지나갔다.
성문을 둘러싼 동산은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자경의 저고리 옷고름 같은 연분홍 복사꽃이 만발하였고, 조금 전 뵌 북촌 정경부인처럼 우아한 자목련이 버선코를 세우듯 날렵하게 봉오리를 터트리려 주춤거렸다. 한 줌 달빛을 흩뿌려놓은 배꽃은 어찌나 청아한지 처녀의 깨끗한 이마 위에 드리운 꿈결 속삭임처럼 광채를 뽐낸다. 고목 가지에 소담스럽게 핀 겹매화를 눈여겨보았다. 저 복스럽고 탐스러운 생김새를 활옷 위에 비단 실로 한 땀 한 땀 누비고 싶었다. 화무십일홍 봄꽃들은 자경의 손 끝에서 사계절 지지 않고 피어나기에 꽃잎들은 자경의 치맛자락으로 화르르 떨어지며 진한 향기를 남겼다.
이제 성문을 지나 언덕길을 내려가면 그리운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달큼한 봄바람이 쓰개치마를 벗은 그녀의 귀밑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이 조선시대임을 알지 못한다.
언제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시간은 언제나 비와 바람과 빛으로만 말할 뿐 자경의 영혼은 어느 시대를 살건 자경 그 자신이었다. 다만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광휘처럼 빛나는 내면이 진짜 별빛이 되어간대도 한 점 먼지 속에 침방나인을 살아낸 자경의 시간은 고이 간직되어 그 나름 빛날 것이다.
싸리나무 울타리 안에 한아름 핀 붉은 명자꽃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자경을 반겨준다.
그 꽃들은 혈육이신 어머니를 향한 자경의 효심이었고, 어릴 때부터 봐온 익숙한 봄날의 얼굴이었다.
명자꽃이 피면 자경은 몸살을 앓았다.
성장의 몸부림 같은 성장통을 명자꽃과 함께 앓았다.
"어머니, 어머니~~"
"자경이 왔어요."
한국민속촌 봄날 풍경입니다.
조선시대 봄날이죠...
그냥 쓰기에는 밋밋해서 침방나인 자경을 불러내었어요.
조선시대를 산 자경이가 그러했듯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자경이도 응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훗날 무엇으로 불리우는지 몰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