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와 야생 메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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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이곳 생활도 몇 달을 보내고 황해도 황주로 이동하였다.

황주는 황해도의 명승지로서 안주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해있다. 지역 환경이 다른 곳에 놓일 때마다 감회는 새롭다. 드넓은 들판의 비옥한 땅이 계절이 다 지나가도록 거둘 작물을 키우지 못해 빈둥거리는 것처럼 황량해 보인다. 이곳은 낮보다 밤의 공습이 너무도 심한 지역이다. 서부와 중부로 갈라지는 전략상 요충지로서 군수품을 실은 자동차의 행렬이 밤이면 끊이질 않고 공습이 빗발처럼 내리 꽂혔다.


행군하면서 보니 주위는 온통 폭탄 세례로 먼지투성이며 뽀얀 흙먼지로 뒤덮인 길바닥은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하였다. 공중에는 조명탄이 대낮처럼 밝게 투하되고 폭격기는 저공으로 헤매대는 곳이라 여기저기 폭격으로 새까맣게 탄 자동차가 너절하게 깔려있다. 우리는 황주 시내에서 20여 리 떨어진 중화(中和) 대송리라는 곳에 머물렀다.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없지만 바라만 봐도 배부른 들판을 내다보는 독채 집에 1개 소대가 투숙되었다. 대지주는 땅을 버리고 떠나갔으며, 빈집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지 여운이 가득하다.

때는 연둣빛 새순이 파릇파릇 물오른 들판을 물들이고 아지랑이 아물아물 대기를 간질이는 봄,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우리들의 얼굴은 너나없이 마른버짐이 피어나고 누렇게 들떠 병든 병아리처럼 햇볕을 쪼이곤 했다. 또다시 초록 생명을 꿈꾸는 희망의 빛깔이 이 땅에 당도하였지만 가련한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청춘은 싱그럽지도 축복받지도 못했다. 누구에게나 소중하게 다가오는 새봄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악다구니만 남은 손아귀에 힘을 쓰는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밤이 되면 높은 지대 땅을 헐어 낮은 데로 돋우는 작업 도중 비행기 공습은 빈번하다. 수없이 겪은 탓에 공습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데는 도가 텄다. 어느 날 밤 동료 한 사람이 공습으로 대피하던 중 풀밭에 엎드렸다가 손이 뱀에 물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폭격 소리에 놀라기는 뱀도 마찬가지였을까.


서로 대피하느라 바쁜 길 하필이면 뱀과 맞닥뜨린 동료가 재수 없었던 거다. 뱀독이 뚫고 들어간 상처 부위에 누군가가 입을 대고 연신 빨아내고 민간요법으로 제독을 다스렸다. 다행히도 봄길 구경 나온 순한 꽃뱀이었던지 동료는 한 달여 만에 완쾌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귀중한 것. 하루는 어떤 동료가 수중에 지니고 있던 붉은색이 도는 우리의 천 원권 지폐를 보여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부적처럼 몸에 지녀왔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인민군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는 마당에 이걸 땅에 묻어야겠소.”

지금까지 몸에 지녀온 것도 용하지만 발각되는 날에는 큰 처벌이 뒤따르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길 떠나면 다시는 그 돈의 행방은 영영 매장되고 만다. 나는 겁도 없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고 그 돈을 나에게 주시오.”

요령껏 잘 감추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숨겨준 내 몫을 요구할 참이었던지 아무튼 욕심이 났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돈이 발각되는 날에는 위험하오. 그땐 혼자 책임질 수 있겠소?”

“끝까지 발설하지 않을 테니 믿고 맡겨 보시죠.”


동료는 돈의 출처가 발각되는 날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질 것을 약속받고 그 돈을 건네주었다. 놈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전해준 돈이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손에 집히는 양이 제법 두둑하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돈의 위력을 부정할 수는 없을 터 내 소지품 깊숙이 보관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전쟁 중 포로병이 되어 이북에 끌려와 헤매는 신세, 수중의 남한 돈은 내 신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물건에 불과함을 욕심 때문에 간과한 것이다. 종이로도 활용가치가 없는 그것을 나는 귀한 보물처럼 여겼다.


며칠 후 쉬고 있던 주간에 난데없이 사물 검사가 시작되었다. 번뜩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돈이다. 어디든 숨겨야만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들통날 것은 뻔한 일, 독 안에 든 쥐처럼 바짝 긴장한 채 할 수 없이 사물 보따리를 소대장 앞에 내밀었다. 피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 들키면 무거운 형벌에 처할 각오를 하였다. 그들은 세뇌공작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한민국 돈으로 어찌해보겠다는 허망한 생각과 자본주의 사상이 깊이 박혀있는 나를 곱게 봐줄 리 없다. 내 보따리 속에서 나온 돈뭉치를 보는 순간 소대장의 눈은 나를 노려보았다.


“동무, 이게 뭐요?”

“남한 돈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요. 어디서 나왔냔 말이오.”

소대장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네, 전쟁 나기 전 휴가차 집에 갔을 때 부모님이 주신 돈입니다. 급할 때 쓰라고 말입니다. 저에게는 돈이 아니라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물건일 뿐입니다. 항상 수중에 넣어 다녔던 건데 미처 처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결국 소대장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괴뢰군 소대장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착한 사람이었던지 나의 죄를 용서해주었다.

“남동무, 다시는 그러지 마우.”라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돈은 회수해가고 문책도 없었다. 정말 다행스럽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화장실에 가니 변이 묻은 천 원짜리 지폐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나면 짚으로 뒤처리를 하는 시대 이북의 농촌은 측간이라고 하여 더욱 어설펐다. 지푸라기도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돈이 똥을 묻혀 마구 흩어져 있는 현장을 목격한 나는 놀랍기만 했다. ‘이곳이 남한이라면 저 돈을 주워 깨끗이 씻으면 돈이 돈인데….’

똥 묻은 돈마저 귀하고 아까웠다. 그런데 이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내 돈은 소대장이 회수해갔는데 어느 간 큰 동료가 내 돈이 발각됨을 보고 은닉한 자기 돈을 이렇게나마 한풀이를 한 것일까. 어쨌든 위험한 처사였다.

한편으로는 화장실 종이로 추락한 돈이 천하게 보였다. 내 욕심으로 신변의 큰 위협을 살 뻔했기에 끝까지 나를 경계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욕심을 묻힌 천한 돈은 멀리하고, 양심껏 땀 흘려 번 귀한 돈을 가까이하였다. 또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의 예의주시 대상에 내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작업 대열에도 앞장서고 성실함을 나타냈다. 다시 한번 소대장 눈에 찍히지 않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숙지해야만 했다.


여기서는 취사를 소대 단위로 해결한다. 당번 두 사람이 밥을 해서 약 1km 떨어진 곳까지 식사 운반을 해야만 했다. 서울 출신 두 사람이 취사병을 맡고 있었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몸은 쇠약하고 밥 냄새를 맡으면서 하루 세끼 밥을 운반하는 일은 두 사람에게 식사를 전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북 출신 김○○라는 친구와 같이 자원해서 식사 당번으로 일하기로 했다. 친구는 나와 동갑이고 마음도 순하여 우리 둘은 여러모로 잘 맞았다. 체력이 약한 나에게는 막노동보다 쉬웠다. 작업장으로 식사를 운반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판에 자생하는 야생 메밀을 보았다.

가을까지 기다려서 메밀묵을 쒀 먹을 일도 없을 것이고 메밀 순을 무작정 뜯어왔다. 무쇠솥에 삶아내어 부족한 된장 대신 지급된 자갈소금(모양이 고르지 않은 자갈처럼 덩어리 진 소금) 분말로 조물조물 무쳐냈다. 그 메밀나물을 식사 때 가져가면 동료들은 어디서 이런 귀한 나물을 구했냐면서 참 맛있다며 잘도 먹어치웠다. 봄철 나물이 이것뿐이랴. 시골 출신 눈 밝은 나는 명아주, 무성하게 자란 비름 순을 잘라 자주 버무려서 나물 반찬을 내면 힘든 동료들의 입맛을 돋워주었다.

큰 솥에다 밥을 하면 누룽지가 생겼다. 친구와 나는 이것을 남몰래 말리어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황주에서 전선까지는 대략 이삼백 리, 탈주하기 위한 준비였다. 보름 동안 긁어모아서 뭉친 누룽지가 제법 되었다. 낮에는 식사 제공으로 분주하나 밤이 되면 우리 둘만의 여가시간이 생겼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긴밀히 의논했다.


“우리 둘만의 탈주냐 아니면 소대원 전체냐.”

“전체 행동을 개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렇지.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우리 둘만의 탈주로 결정하자.”

“탈주로는 전에 북진할 때 길을 거꾸로 더듬어 가면 그리 어려울 것 없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면서 큰길을 따라 개성까지만 무사히 가면 돼.”

초승달이 가만히 내려다보는 저녁에 친구와 나는 배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들판 옆길로 샜다. 옷 속에 숨겨서 허리춤에 찬 불룩한 누룽지로 열흘 배고픔은 면할 것이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도 안성맞춤 우리들을 도와주었다.

“야, 안 되겠다. 돌아가자.”


금방이라도 인민군 병사들이 달려들어 총을 겨누면서 우리들을 수색해 잡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지 않으면 동료들이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넘기게 되고 우리들의 부재는 곧바로 탄로 날 것이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작정 오던 길을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무모했다.


들통나면 우리 둘만의 책임뿐만 아니라 동료들까지 같은 죄목으로 처형될 게 틀림없다. 평소 “형님, 형님” 하면서 따르던 나이 어린 학도병들의 얼굴까지 눈앞에 어른거린다. 사지에서 고락을 함께 한 우리, 동료들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직 아무도 귀가하지 않았다. 더 이상 탈출을 공모하지 않겠다고 우리 둘은 다짐했다. 전쟁이 끝나면 함께 돌아가는 그 날까지 동료들과 생과 사를 같이 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결정하고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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