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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05. 2021

야채꽃

기대를 말았어야 했다. 그럼 실망할 일도 없었을 것을. 현관문 앞에 놓인 바구니를 본 순간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얼핏 보아 풋과일 바구니인 줄 알았다. 희멀거니 푸르뎅뎅 꽃들이 저렇게 생겨 먹어도 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생일을 축하해주는 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색에 가까운 연분홍 장미 댓 송이 퍼드러져 시큰둥한데 연둣빛 흰 국화 사이사이 브로콜리(?) 푸른 야채들이 듬성듬성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창백한 꽃바구니. 이상하게 생겼다. 꽃을 받고 이렇게 기분 나쁜 적은 처음이다. ‘야채꽃 같아!’     


지난 4년간 지방 근무 떠돌다 상경한 올해만큼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간 셀프 꽃다발로 생일을 자축한 내 취향은 2월의 프리지어 장미 안개꽃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빨간 장미 한 송이만 꽂혀있어도 괜찮았을 텐데… 남편의 무성의 무감각 무지, 3無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성의 없는 남편의 꽃배달 전화 한 통, 업자도 대충 싸구려 섞어찌개 만들어 배달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냉기류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아침마다 ABC 착즙 주스 만들어준 내공이 이런 거였다니. 무기력한 내 모습 들켜버린 봄 햇살에 초라해 보여 견딜 수가 없다. 대충 차려 먹은 생일상을 근사하게 제대로 먹고 싶어졌다. 코트를 챙겨 입고 아이 둘 데리고 자주 가는 호수로 차를 몰았다.     


금잔디 빛나는 푸른 하늘 아래 청매 백매 산수유 꽃망울이 도톰한 갈망을 오므린 봄. 발걸음도 가볍게 이른 봄의 생글생글 수줍은 생기로움이 찌그러진 마음 활짝 펴준다. 늦은 점심 우리밖에 없는 레이크뷰 창가에서 오후 정찬을 느긋하게 먹었다. 한 끼 포만감을 인지한 뇌도 만족스러운지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을 즉각 분비한다.     


높다란 2층 높이 야외 계단을 내려올 때는 세상 부럽잖은 여왕의 걸음으로 머릿결을 살살 빗질하는 봄바람에 고개 든 저 멀리, 그녀를 보았다. 모딜리아니처럼 기다란 목에 아름다운 어깨 곡선을 지닌 그녀를. 그녀는 눈부시게 희다. 겨울을 몹시 사랑하는 차가운 혈통의 콧대 높은 그녀를 여기서 만나다니. 너무 놀란 나머지 걸음을 멈추었고 내 눈을 의심했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몇 년 전 그녀를 처음 본 날을 잊을 수 없다. ‘플레타나’ 전통 배를 타고 건너던 슬로베니아 블레드호. 때마침 빗방울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수면 위로 말간 파동을 전하던 저 너머 그녀가 있었다. 늦가을 한기에 어깨를 파묻은 그녀는 흐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만의 성지에서 머리를 숙인 모습. 우아한 몸짓으로 영감을 주는 그녀 머리 위에 시그너스 왕관 별이 반짝거렸다.  

    

우리 문화권은 어깨에 무관심하다. 기껏 짐을 부리고 가방을 메는 노동의 용도로 전락하였다. 심지어 어깨를 드러내는 오픈 숄더 드레스 코드를 무척 꺼린다. 재킷에 어깨 심지를 덧대어 부풀리는 오버핏으로 덮어버리기에 급급하다. 동그란 반원형 어깨 곡선이 얼마나 예쁜 줄 모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도구로 폄하했다. 


내가 어깨를 재발견한 건 체코 숙소에서 어느 노신사와 사진을 찍을 때였다. 그는 나의 굿모닝 인사와 목례, 두 번의 인사를 받고는 나를 유달리 보았던지 자신의 정원을 보여주고는 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때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던 그분의 손길에서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봄바람 같은 손길을.     


한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는 방식이 어깨로 표현되고 느낄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위로의 손길이 필요할 때 흔히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경의를 표하는 계급장이 어깨 위에 달리는 것도 같은 의미 아닐까. 서양 사람들은 ‘별일 아님’을 표현할 때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두 손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한다.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우리 부모세대들이 더 흥과 멋을 표현할 줄 알았다.      


기분이 좋으면 어깨가 솟고, 기분이 나쁘면 어깨가 처진다. 한 사람의 기분을 저울질하는 어깨는 성전, 그 사람의 신념 권위 자존심 후광이 어깨 위로 넘나든다. 고독이 물결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어깨에 혹하였다. 그녀도 나를 본 걸까. 이따금 어깻죽지 퍼덕이며 기다란 팔을 활짝 벌려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빙긋 미소 지은 나, 슬픈 생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호수를 한 바퀴 돌 동안 그녀는 무리 속에 섞여 가까이 오지 않는다. 낯을 엄청 가린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니? 겨우내 사람들 눈에 띄었다는데 왜 오늘에야 널 보게 된 걸까. 쌍둥이 호수 위쪽만 빙글빙글 돈 편협한 발걸음이 아래쪽 호수에 사는 널 놓치고 만 걸 거야.      


경포호 낙동강 하구 겨울 별장에서 지내던 네가 그 높은 고공을 활강하여 빌딩 숲 작은 호수를 발견한 건 기적 같은 일이었어. 꽃잎 화사한 천국의 봄이 네게는 못 견디고 떠나야만 하는 계절. 며칠 내 찬바람 부는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훅 떠나버릴까 봐 삼일절 억수 비 쏟아지는 하늘을 우산 받쳐 네게로 갔어.   

  

너는 섬세하고 예민하고 고상해. 네 깃털을 빌려 입은 발레리나들이 열 개의 발톱 마디마디 피멍 맺힌 비장미를 춤추고 흉내 내잖아. 네 고혹적 자태에 반하여. 너는 고귀한 깃털을 쫄딱 적시며 체면 구길 족속이 아니었어. 운동화 밑창에 찬비가 질컥질컥 차올라서 한기에 몸을 떠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헛걸음을 곱씹는다.      


서러운 짝사랑에 어깨가 굳고 우산 아래 빗발치는 비바람이 바짓가랑이 다 적셔버렸다. 호수에는 물닭 왜가리 뿔논병아리들이 대책 없이 홀딱 비 맞은 내 신세되어 처량한 울음소리 낸다. 천연기념물 큰고니는 다시 날아와 줄까. 차이콥스키 음악이 흐르는 라이브 공연 ‘백조의 호수’를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볼 수 있다면 못생긴 꽃을 선물한 남편을 용서해주겠다.

     

찬 베란다에서 시들기는커녕 벙글벙글 뒷심을 발휘하는 꽃이 무슨 잘못인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우나 고우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직박구리 남편. 며칠 날 세운 깃털 가라앉혀야겠다. 

난 백조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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