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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Apr 27. 2021

행복은 0그램

붉은색이 감도는 줄기가 여러 겹 꼬인 나무를 올려다보니 노란 꽃술이 얌전한 산수유가 다시 피어났다. 어둠이 홍수 진 창밖으로는 반짝이는 별들이 초롱초롱…

그때 어디선가 ‘나뭇잎 사이로’ 노래가 들렸다.     

 

모닝콜에 산산이 흩어진 꿈의 조각, 퍼즐을 맞추듯 잠시 두리번거렸다.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머문 것도 잠시 잠깐. 이번 주 등교하는 아이를 깨우러 세 번이나 들락거리고도 꾸물대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차로 태워다 주고 주정차위반 과태료를 물어냈다.  

    

봄비 물씬 오던 날 한적한 포켓차로에 비상등을 켜놓은 채 빵집 다녀온 시간 십여 분이 뒤늦은 고지서를 부과했다. 10분 동안 그 구역 공간을 점유한 시공간 합산 과태료이다. 휴일 문 닫은 공공기관 앞 텅 빈 포켓차로가 미끼인 줄 모르고 덥석 문 내 차를 눈에 띄지 않는 초소형 카메라가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빗길에 걷고 싶었다. 우산 안으로 날아든 한 방울 두 방울… 엄청 비싼 빗방울 커피를 마신 셈이다. 괜찮다. 비 냄새 밴 그날 빵은 충분히 맛있었다. 조금 전에는 원고 청탁도 받았다.      


‘옥스퍼드 행복지수’라는 설문조사가 있다. 29 각 문항마다 동의 안 함(1점)부터 동의함(6점)까지 점수가 매겨져 있다. 질문은 긍정형과 부정형이 섞여 있다. 

부정형 문항을 몇 가지 들면

- 나는 현재의 나 자신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내가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특별히 내 삶을 통제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긍정형 질문 중에 눈길을 끄는 문항을 소개하면

- 나는 자주 웃는다

- 나는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나는 보통 어떤 일들에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     


점수를 합산해서 나누기 29 하니까 나의 행복지수가 평균에 근접했다. 행복지수는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시차를 두고 확인해봄으로써 현재의 안녕을 챙기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주정차위반 과태료가 오늘 하루 나의 행복을 빼앗아가진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사방에 카메라가 노려보는 세상 털끝만큼 조심하면 된다.     


나는 자주 웃는다? 솔직히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려본다. 웃음을 위장한 자기만족이 무표정을 비웃는다. 걸음마를 막 뗀 아기들이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시시 새 나온다. 구멍 난 양말의 뻥 뚫린 입을 볼 때도 초승달 눈이 된다. 호소력 짙은 양말의 하소연이 감동적이어서.      

나는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매우 그렇다. 심미안적 감각이 발달한 편이다. 돌 틈 키 작은 오랑캐꽃을 바라보다가 바람결에 뒤척이는 나뭇잎을 거쳐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색채를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오묘한 빛깔이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나는 특별히 내 삶을 통제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통제할 수 있다. 운칠기삼 통제  하에 나의 의지를 기울임으로써 운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좀 더 부드럽게 연마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운명의 배를 모는 선장은 바로 나. 운이 좋으면 순풍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운을 만날 수가 있을까. 사람 이름 같은 럭키(Lucky)는 언제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나. 저 길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저 언덕을 올라가면 만나지지 않을까. 성현의 말씀에 행복지행복(幸福之行福), 행복도 행해야 복이 된다. 다행하다는 것은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다. 나의 선의지로써 행함이 복을 지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요행을 바라다간 큰코다칠 일이다.    

 

제비가 우연히 박씨를 물어다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준 흥부의 선행과 미물을 사랑하는 착한 마음이 복을 물어다 주었다. 나의 복과 재앙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칠기삼이 아닌 운삼기칠이 아닐까.      


숫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수화시킨 행복지수는 오락지수이다. 행복을 어떻게 점수로 매길 수 있나. 행복은 무조건 100점이다. 잠시 스쳐가는 백 점짜리 행복이 하루 종일, 노력 대비 성과물이 크다면 몇 날 며칠 약발을 듣는다. 자신이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의 민감지수를 많이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더 행복한 자격을 누린다.     


‘나는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문항은 생활에 매우 중요한 행복의 척도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끼기 위해 자주 산책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의 소유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자연은 무한정 공짜로 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누리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이 누리게끔 듬뿍듬뿍 덤으로 준다.     


틈만 나면 어느새 녹음이 짙어진 숲으로 나무 가까이 다가선다. 떠난 줄 알았던 뿔논병아리들이 호수 아래 자맥질하고 풀방석을 꾸며놓은 어미가 포란하는 모습은 엄중해 보였다. 닥터 지바고의 무의식에 스며든 귀룽나무 꽃향기 곧 맡게 되리라. 주머니에 울퉁불퉁한 호두 한 알 넣고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호두는 언제든 깨 먹을 수 있는 고소한 기대치를 한껏 높이면서 내 주머니 안에서 여유를 부린다. 호두 한 알만 한 행복이다.   

   

며칠 전 ‘설악 풀꽃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설악산 금강굴 아찔한 바위 벼랑을 타는 지게꾼의 발걸음을 따라서 복수초 노루귀 깽깽이풀 봄 야생화들이 피고 지고, 산양이 물끄러미 고개 내미는 그 길에 서서 그는 말한다.  

    

“들꽃이 험악한 데도 피고 올라오는 건 그만큼 고난을 겪는다는 거잖아요. 땅을 뚫고 올라올 땐 생명이 그만큼 강력하단 뜻이거든요. 인생살이가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풀이나 사람 사는 거나.”     


45년 지게꾼 임기종 씨는 85kg 냉장고를 짊어지고도 오르막 거친 산길을 걸었다. 한 걸음이 태산이요, 태산 같은 한 걸음을 옮기며 장군봉 울산바위 암릉들이 이 사내의 외길 인생행로를 지켜보는 지원군이자 순간의 허튼 걸음을 용서치 않는 외줄타기를 종용하였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부인을 진달래꽃같이 한 아름 지게에 태우고 설악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더운 눈물을 자아냈다.     

 

엘리트 지식인들의 세련된 행복강좌를 부끄럽게 만드는 리얼 다큐였다. 행복이 별건가. 저런 거지. 그 사람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훌륭한 지게꾼 철학자이다. 귀한 걸수록 부피는 점점 작아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택배 상자도 큰 것보다 작아질수록 값어치는 더 높은 경우가 많다. 귀금속이 담긴 보석상자는 얼마나 작고 앙증맞나. 마음으로 느껴서 아는 고귀한 가치들은 아예 모습을 감추고 만다. 내 눈앞에 있음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 찾고 헤맨다.    

   

행복은 단순한 것. 가난한 마음.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그것. 아주 작고 소박한 것. 대문을 활짝 열어두어도 들어오지 않는 것. 샛문으로 살짝 들어와서 잠시 놀다 나가는 손님. 가벼운 풋웃음 띤, 한 뼘 크기, 질량은 0그램. 무탈한 오늘 하루 기적을, 행복이라 부른다.       


    






**타이틀 이미지>> kbs 환경다큐 <설악 풀꽃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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