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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l 17. 2020

사춘기와 사추기

_ 엄마와 딸

장맛비가 우후죽순의 기세로 날리는 아침 등교 준비를 하던 딸내미는 자기가 찾는 옷이 없다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세탁은 왜 미리 해놓지 않았는지, 반찬은 먹을 것이 없다며 숟가락을 탁, 놓는데 불목하니 취급을 당한 나는 급기야 소리쳤다.      


“야, 먹기 싫음 먹지 마. 오늘 버스 타고 가.” 

“엄마는 꺼져.” 

방으로 들어오는 내 등 뒤에 아이는 따가운 화살표를 날려버린다. 아, 무너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드러눕는다. “웽~ 웽~ ”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에 더 심란하다. 창문 위로 얼룩지는 빗방울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더 후벼 팠다. 엄마 속 헤집어놓고 자기 머리 손질하는 아이가 더 얄밉다.     

 

잠시 후 그새 화장까지 마친 아이가 데려다 달라고 한다. 꼬리를 내리거나 부탁하는 태도가 아닌 퉁명스럽게 “데려다줘.”

 “버스 타고 가랬잖아.”

 “이미 늦었어.” 

“네 잘못에 대해서 사과해,” 

“뭘” 잠시 기싸움이 흐른다.

 “아이~ 미안해.”     


마지못해 차 키를 집어 들고 툴툴거리는 나, 한통속이다. 집을 나서자 지하도 초입부터 차들이 잔뜩 밀려있다. 계기판에는 ‘타이어 공기압이 낮음’을 나타내는 주황색 경고등이 뜬다. 날씨도, 기분도, 타이어도 삼박자를 맞춘 저기압 월요일. 교문 앞에 도착한 시각은 8시 54분, 가까스로 지각을 모면했다.     

 

봄의 문턱을 힘겹게 넘어선 이후 줄곧 계속된 아이와의 신경전은 하루에도 여러 번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진로 문제로 큰 산을 넘었다고 안도하였는데, 일상을 엮어가는 뜨개바늘의 코가 흐트러져 실수를 연발한다.      


겨울방학 동안 제 방에서 커튼 치고 춤과 노래를 일삼던 아이는 어느 날 아이돌이 되겠다고 선포하였다. 처음엔 묵살, 탐색전을 거쳐, 집요한 요구가 이어지고, 실용음악학원을 경유하여, 포기시키기까지 서너 달이 걸렸다. 코로나와 겹친 봄날 칩거 기간 동안 우리 집은 해빙기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격주로 등교하는 여름에 이르렀고 냉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쌍꺼풀 수술을 해달라고 조른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아이 얼굴에 차마 칼을 대러 가는 길에 동행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미성년자의 그것은 내 책임이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성인이 된 네가 스스로 책임지고 하라고 얼러서 달래는데 또 엄청난 에너지와 협상의 기술과 시간 낭비가 필요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근엔 일 년에 두서너 번 커트하러 미장원 가는 나에게 아이는 보란 듯이 매직 스트레이트를 하고 왔다. 친구들도 다 한다고 한다. 참기름을 바른 듯이 빤질거리는 아이의 머릿결을 보면서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뒤늦게 짐작하는 나는 구식 엄마이다.     


시골에서 아무렇게나 비바람 맞고 자란 나는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돌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내 아이들 ‘감정 읽기’에 서툰 편이다. 문득 내게도 사춘기가 있었는지 떠올려본다. 딱 한 번, 학교 근처 친한 친구 집에서 부모 허락 없이 자고 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어차피 나 같은 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 날 집에 가던 중 동네 남학생을 만났는데 너 아버지가 너 어디 갔는지 찾더라는 것이다. 잔뜩 주눅 들어 집에 들어간 내게 엄격하신 아버진 아무 말씀 않으셨다. 엄청 혼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잘못을 안 내게 더 이상 추궁 않으신 아버지 태도가 더 어렵게 여겨졌다. 단 한 번의 일탈이었다.     

 

딸아이는 연둣빛 봄날에서 오만 가지 꽃을 피우는 녹색 장원의 세계로 넘어가는 사춘기(思春期)에 이르렀고, 여름을 지나 가을에 막 이른 엄마는 계절성 유사 사춘기를 앓고 있다. 실비가 오면 오는 대로, 폭우를 몰고 오는 바람결에도 예민하다.      


꽃무늬 원피스를 찾고, 밀키 핑크 라벤더 보라색에 자꾸 손길이 가는 걸 어쩌란 말인가. 봄은 세 달에 걸쳐 완성되지만 모든 것이 여울져 스러지는 가을 속에도 ‘봄’은 들어있다. 아침저녁 쌀쌀해지는 시월 어느 날에, 진달래는 연분홍 꽃봉오리를 살며시 열어 보이고 개나리도 노란 꽃을 철없이 피워낸다. 무심코 걷는 길바닥 민들레도 쨍그랑 별이 떠서 스텝이 꼬이는 수가 있다.     


생체시계를 교란하는 봄이 아주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아이가 내지르는 짜증 한마디 푸근하게 품지 못한 채 맞받아치는 나, 엄마 맞나? 평소 존경하는 지인분께 전화를 드렸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물이나 상황에는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속이 있으면 겉이 있다.”라고.   

  

아이가 맹렬하게 ‘앞’을 얘기할 때 나는 ‘뒤’를 말했다. ‘겉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속 알맹이’가 진짜라고 강변했다. 자신의 말과 생각이 세상의 전부인 걸로 착각하고 핏대를 세우는 사춘기 아이에게 씨도 안 먹히는 내 말.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한발 물러서서 카톡으로 못다 한 얘기를 전했다. 답신은 없지만 읽었다. 스무고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고갯길이 숨 가쁘다. 난분분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눈밭에서 어지러이 발자국을 찍어대는 딸아이와 나.    

  

이 무질서한 눈싸움이 한바탕 그치고 나면 아무도 걷지 않은 설원 위로 내 발자국을 순하게 따라오는 아이의 걸음이 또렷하게 새겨질 날 있을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깎여나간 나의 모서리를 더듬어본다. 각이 선 듯 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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