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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03. 2020

쌀 한 자루

팔월 중순까지 릴레이 하던 여름 장마가 가을장마로 이어진 9월의 첫날, 현관문 앞에 쌀 한 자루가 도착해 있다. 20kg 채우고도 꽉꽉 눌러 담아서 자루를 묶은 손잡이 부분이 임계점에 이르러 간신히 다물렸다. 내 수완으로는 덜렁 들어 옮길 재간이 없어 질질 끌어다 피아노 방에 옮겨놨다.     


옮겨놓고 보니 쌀자루 모서리에 흘러내리듯 내 이름 석 자를 적은 아버지 필체가 멋들어지다. 집 마당에서 정미기로 갓 도정하여 온기가 남아있는 쌀자루에 아버지의 마음이 그득 담겨 태산 같은 부피감과 무게감으로 확 와 닿는다. 빗물에 젖을까 비닐 주머니에 들어간 송장이 테이프로 친친 감긴, 우리 식구 두어 달은 먹을 양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배부르다.      


고향 들판 우리 논은 벌써 벼꽃이 허옇게 펴서 낟알이 송송 맺히고 벼 이삭이 고개를 수그렸다고 한다. 모심기를 일찍 해서 주위 다른 논들에 비해 생육이 빠르단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벅차다고 하신다. 슬하 자식들 다 내보내고 적적하신 부모님께 우리 논이 효자 노릇 제대로 하는가 보다.  

   

아침저녁 하루 두 번 도로를 건너 걸어가셔서 들판의 생장을 지켜보는 부모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지난주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논둑길에 앉아서 난생처음 너 엄마를 가까이 불렀다. 여기 와 보래, 우리가 언제까지 농사를 지으려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벼들 좀 보래. 모심기할 때 (이양기가 빠트린 모퉁이마다 돌아가며) 모 모두고, 지팡이 짚어가며 피(잡초) 뽑고, 그 수고로움 야들이 다 알아준다. 자네 수고 많았네.”    

 

그 얘기를 전해 듣는데 눈가에 눈물이 핑그르르 맺혔다. 직접 본 듯이 한 장의 그림이 선명하게 내 눈앞에 그려졌다. 손을 맞잡은 노부부는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의 손 안에서 거칠게 흘러온 인생을 쓰다듬었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했으리라. 눈 앞에 펼쳐진 들판이 곧 풍요로운 황금빛 곳간을 철석같이 선물해줄 것이므로. 기쁨의 파고가 가슴 언저리 충만히 적셔주었으리라.     


살아온 날들이 힘에 겨웠음에도,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였고, 물굽이를 도는 삶의 여울목이 가까워옴에도 개의치 않고, 열매를 가득 매단 벼 이삭들이 그 곁에 온순하게 고개 숙인 그림! 대자연의 섭리에 가장 순응하는 그림이 아닐까.     


그 심정 그대로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 객지 나온 이후 부모님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양식을 부쳐주셨다. 야금야금 양식을 갉아먹은 나는 자루 밑바닥에 이르러 숨은 쌀 한 톨까지 탈탈 털어 양재기에 쏟아붓고 나면 빈 자루를 고이 접어 명절에 고향 갈 때 되돌려드렸다. 쌀 한 자루에 담긴 쌀알의 수는 몇 개나 될까. 그 은혜로움 헤아리지 못한 채 당연하게 넙죽 받아먹은 내 지난날의 습성이 야속하다.     


성장기 때 나도 논바닥에 투입된 적 있다. 엄격하신 아버지는 바로 위 언니와 나를 일꾼처럼 부려먹었다. 자급자족 부족한 일손을 메우려고 그랬을 것이다. 거머리가 철썩 들러붙는 계곡 논에 피를 뽑으라며 등 떠밀렸고, 볏단을 묶어 머리에 이고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내렸으며, 어느 해 수확철에는 시퍼런 무쇠 낫을 내 말랑한 손에 쥐여주며 허리 높이까지 자란 벼 포기 아랫부분을 왼손으로 감싸 쥐며 오른손에 든 낫으로 싹둑 베는 시범을 보이셨다.   

   

지금부터 일러준 대로 작업 속도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숫돌에 갈아서 번득거리는 낫이 벼 포기를 벨 때 “솨르락” 경쾌한 멜로디가 났다. 그 소리에 호기심이 발동했던 철부지였다.     


내게 할당된 벼들의 대열은 곧은 일직선이었다. 밀도 높고 질서 정연한 벼들의 서식지가 숨 막히는 노동을 강요했다. 식구들 점심 내온다고 집으로 차출된 언니가 부러웠다. 끝이 안 보이는 벼들의 행렬에 순종하여 예닐곱 걸음 나아갔을 때 무서운 무쇠 날이 내 왼손 손가락 세 마디를 스쳐 지났다. 물이 괸 논바닥에 선홍빛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 울상이 된 내 소리에 놀란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오셨다. 재빨리 입고 있던 난닝구를 훌러덩 벗어 찢어내고는 내 손가락을 묶어주며 화를 내셨다. 속마음은 이렇게 나무랐을 것이다. “벼 포기 베라고 했지, 누가 네 손가락 베라고 하더나.”    

  

나는 내 손 아픈 것보다 그 궂은 사내들의 노동에서 해방된 사실이 더 홀가분하여 붕대를 맨 왼손을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왼손을 가만히 구부려본다. 중지 무명지 첫째 마디에 아주 희미한 흰색 사선이 그때 날이 스친 기억을 또렷이 증명해준다.   

   

앞날에 나는 부모님께 몇 번의 양식을 더 받을 수 있으려나. 낑낑대며 받은 이번 쌀자루는 더없이 귀한 선물이었다. 이 귀한 선물을 전해주려고 이른 봄부터 가을 이르도록 질퍽한 논바닥에 부모님은 쇠약해진 두 다리를 심어 적셨다. 뜨겁게 달아오른 뙤약볕을 견디셨다. 아픈 허리를 기역 자로 꺾으셨다. 늙은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량을 감당하셨다. 이로 인해 뼈마디가 쑤시는 아픔을 참으셨다.  

   

건조장에 보관한 나락을 퍼내어 또 옮기고 정미기에 찧었다. 드디어 뽀얀 얼굴 드러낸 백옥 같은 쌀을 깨끗한 자루에 퍼 담아서 택배 직원을 불러 현금을 지불하고 부치셨다. 부모님의 뼈마디가 닳은 고통의 대가를 치른 쌀 한 자루. 


나는 이보다 더 진귀한 선물을 알지 못한다. 돈으로 치면 십만 원 값어치지만 이 세상 가장 소중한 가치들은 어리석은 숫자를 거부한다. 저울에 눈금 매기는 사랑을 본 적이 있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당신이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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