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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물 Jan 22. 2020

3. 서툰 취미의 너그러움

막 해도 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있다는 것.
아이처럼 있어도 되는 시간.
‘막’ 해도 되는 것.
서툰 취미는 참 너그럽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종종 끄적거리듯 그림을 그린다. 결과물은 그다지이다. 잘 그리지는 못 한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그려야지’ 생각했던 대로 그릴만한 실력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이런 서툰 상태가 썩 마음에 든다. 초보자에게만 허락되는 너그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해도 된다는 것. 좀 촌스러운 내 그림은 멋지지 않지만, 그런대로, 아니 그렇기 때문에 즐기게 된다.

이것이 직업도 아니고, 전문가는 물론이거니와 아마추어라고도 할 수 없는 일. 누구와 비교할 일이 없는 그림 그리기는 나만의 시간이자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더 잘그린다면야 좋겠지만, 별로 더 나은 실력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결과물이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그 시간이 좋은 것이다.

한번은 마커와 색연필 전문가용 세트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그림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준 사려 깊은 선물이었다. 그러나, 선물해준 이에게 조금 김이 샐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 더 열심히 그려볼 마음은 없었다.
요즘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면, 본업이 아니어도 취미로 하는 활동에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전문적인 취미라니, 참 멋진 일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실력을 갈고닦아서 어느 수준에 오른다는 것. 꾸준한 인내와 즐기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매우 대단한 일이다. 그런분들을 보면 내가 취미에 가진 실력들은 형편 없다.
그런데 실력이 형편없어도, 아주 서툰 취미라도 아주 인생에 도움이 된다. 아주 서툰 나의 그림 그리기는 나를 아이로 만들어 준다. 미흡한 실력이 이해되고, 잘하지 못해도 괜찮은 마음으로 나를 풀어준다.

아이와 그림을 그리거나 무엇을 색칠해보려고 할 때, 아이가 나에게 가끔 묻는다.
“엄마, 이거 막 해도 되는 거야?”
학교에 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되는 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을  많이 익히고 있는 아이.
물론 인간으로서 책임을 배우고 무언가를 생각해서 의도대로 실행해보는 연습은 이 시기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살면서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들이 좀 있어야 숨이 쉬어진다는 것도 맞는 말.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일들은 막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앞뒤 상황을 잘 살펴야 하고, 처음 계획대로 일이 되어가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막 해도 되는 시간’을 갖는다.
음악을 틀어놓고 막, 그냥 막 춤을 춘다. ‘이렇게 춰야 되는 거야’없이.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에 아이는 아주 선수다. 나도 아이의 흥에 맞추다 보면 신이 난다.
선을 따라 그린다거나, 알맞은 글자를 써야 한다거나 그런 거 말고, 한 번씩은 마음대로 그려보기를 한다. 학교에서 하듯이 ‘동물을 그려보세요,’  ‘꽃을 그려보세요,’  ‘가족을 그려보세요’ 안 하고.
아무렇게나 끼적이고서는 나중에 무슨 모양 같은지 그제야 생각해보기도 한다.

해내야 하는 일들 사이에서, 해내지 않아도 되는 일을 두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큰 일 날 일이 아니라면, 서툰 것을 서툰 대로 좀 놔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엉성한 틈 사이로 너그러운 빛이 들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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