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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중얼

"당신의 데뷰작은 무엇입니까?"

by 꼬불이

"당신의 데뷔작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을 때 떠오르는 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그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보낸 수많은 밤들이다.


반면,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의 데뷔작을 보면 마치 그들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길을 걸었다.



"거장들의 첫걸음"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 『듀얼』(1971)은 단순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업가가 고속도로에서 정체불명의 트럭 운전사에게 쫓기는 73분짜리 스릴러. 트럭 운전사의 얼굴도 나오지 않고,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한 남자가 거대한 트럭에게 쫓기며 생존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설정으로 스필버그는 서스펜스의 마법사임을 증명했다. 영화는 큰 화제를 모으며 그를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신예 감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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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필버그가 『듀얼』을 만들기까지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3세부터 8mm 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그는 USC 영화과에 두 번 떨어졌다. 대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6개월 동안 무급으로 일하며 업계 사람들과 인맥을 쌓았다. 그의 첫 TV 영화 기회는 이런 끈질긴 노력 끝에 찾아왔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92)은 강도들의 이야기를 비선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다이아몬드 강도 계획이 실패한 후, 창고에 모인 강도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진짜 배신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강도 장면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캐릭터들의 과거를 조각조각 보여주며 각자의 동기와 갈등을 드러낸다. 독특한 대화와 폭력의 미학으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으며 타란티노를 컬트 영화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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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란티노는 고교 중퇴 후 비디오 가게에서 5년간 일하며 영화를 공부했다.


첫 시나리오 『트루 로맨스』는 여러 제작사에서 거절당했고, 생활비를 위해 시나리오를 팔아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저수지의 개들』도 극장 개봉조차 어려웠던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조지 루카스의 『THX 1138』(1971)은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를 그린 SF 영화다. 감정을 억제하는 약물로 통제되는 사회에서 THX 1138이라는 남자가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약물 복용을 거부한 그는 연인과 함께 지하 도시를 탈출하려 한다. 하지만 연인은 붙잡히고, 홀로 지상으로 향하는 그의 앞에 석양이 펼쳐진다. 냉혹한 미래 사회에 대한 경고와 인간성 회복의 메시지를 담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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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는 USC 영화과 재학 중 만든 단편 『THX 1138 4EB』를 장편으로 확장했지만, 워너브라더스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개봉 후 흥행참패를 겪었다. 루카스는 USC 시절부터 실험적인 작품들로 주목받았지만, 첫 장편영화의 실패로 큰 좌절을 맛봤다. 이후 『아메리칸 그래피티』로 재기하기까지 또 다른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창동의 『초록물고기』(1997)는 사회에서 소외된 청년들의 이야기다. 제대 후 갈 곳 없는 막동이 옛 동료들을 찾아가지만 모두 변해있다. 친구 박정환은 조직폭력배가 되어 있고, 그의 여자친구 미혜와 막동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막동은 정환의 조직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정환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청년의 비극을 통해 9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로 이창동은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세계적인 감독의 첫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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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창동은 원래 소설가였다. 등단 후 10년간 소설을 쓰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도 생계 때문이었다. 『초록물고기』를 만들기까지 수년간 영화 공부를 하며 준비했지만, 첫 연출작이라는 부담감으로 촬영 내내 불안해했다고 한다.






"스포트라이트 뒤의 어둠"


이들의 공통점은 데뷔작이 나오기까지 긴 준비 기간을 거쳤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무단침입, 타란티노의 비디오 가게 알바, 루카스의 실험영화 제작, 이창동의 소설가 시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무기를 벼리고 있었다.


거절은 일상이었다.


제작사 문전박대, 투자자들의 외면, 주변 사람들의 의심 어린 시선. "영화로 밥 먹고살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 속으로 답을 못하던 시절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현실의 벽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데뷔작이 모두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이다.


스필버그는 TV 영화라는 새로운 포맷으로, 타란티노는 비선형 서사로, 루카스는 실험적 SF로, 이창동은 사회 리얼리즘으로. 기존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더욱 어려웠고,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견뎌라"


언론은 거장들의 화려한 데뷔작만 보여준다.


마치 그들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였던 것처럼.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다. 거절당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끝까지 견뎠다는 것뿐이다.


스필버그는 대학에 떨어졌어도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타란티노는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도 영화를 공부했다.


루카스는 첫 작품이 실패해도 계속 만들었다.


이창동은 40대에 감독 데뷔를 해도 늦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거장들의 찬란한 데뷔작을 보며 "나는 타고난 재능이 없나?"라고 좌절하지 마라.


언론이 보여주지 못한 그들의 데뷔 이전을 생각해봐라. 그들도 여러분처럼 길고 깊고 힘든 거절과 훈련의 시간을 견뎠다.


견딘 사람만이 스포트라이트 앞에 설 수 있다.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는 그 앞의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에 달려 있다. 지금 여러분이 걷고 있는 그 어둠의 길이 바로 거장들이 걸었던 길이다.


포기하지 마라.


"당신의 데뷰작은 무엇인가요?" 그 대답을 위해서 차곡차곡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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