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의 문체, 씬 구성, 시간·공간 표기법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제작 시스템 전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극본, 대본, 시나리오의 형식. 그 ‘언어’의 계보를 따라가 보려 한다.
꽤 오래 전 부터 사용하는 ‘S#1. 집 안 – 밤’ 같은 구조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1900년대 초, 무성영화 시절의 시나리오는 단지 감독의 메모에 불과했다.
“남자, 개를 쫓는다.” 정도의 줄거리 메모.
하지만 193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이 완성되면서, 영화는 수십 명의 스태프가 동시에 작업하는 산업적 시스템으로 변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형식이다.
INT. LIVING ROOM – NIGHT
John sits at the table, staring at the photo.
INT./EXT. (실내/실외)
LOCATION (장소)
DAY/NIGHT (시간)
그리고 대사(Dialogue)와 지문(Action)을 분리한 ‘촬영용 문서’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영상 산업의 표준이 된 Master Scene Format의 시작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은 미군정 하에서 미국식 방송 시스템을 통째로 이식받았다. NHK와 TBS 같은 방송국들이 헐리우드의 시나리오 포맷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방송 제작용으로 변형했다.
SCENE 5 居間 (夜) 佐藤「どこへ行ったんだ?」
SCENE 넘버 (씬 번호)
장소 (居間)
시간 (夜)
그리고 인물명 왼쪽 정렬, 대사 중심 구성
이 형식은 연극의 문학적 문체가 아니라, 방송 제작을 위한 기술 문서였다. ‘문학적 희곡’에서 ‘제작용 매뉴얼’로의 변환 — 이건 시나리오라는 장르의 혁명이었다.
1960년대, KBS와 MBC가 개국하며 한국은 본격적인 방송 드라마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기 PD와 작가들은 일본 방송국에서 연수를 받았고, 그들이 돌아오면서 일본식 방송 포맷을 그대로 들여왔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 드라마 대본은 이렇게 시작한다.
S#12. 거실 – 밤
민수는 혼자 술잔을 들고 있다.
민수 :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 구조는 일본 NHK식 포맷의 한국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씬 번호, 장소, 시간, 그리고 괄호 속 지문.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한국 드라마의 기본 언어로 자리 잡았다.
컬러TV와 미니시리즈 시대가 열리면서, 각 방송국은 자체 표준 대본 규격을 만들었다.
S# (씬 번호)
장소 – 시간
지문은 괄호 처리
인물명은 왼쪽 정렬, 대사는 오른쪽 정렬
각 씬은 한 줄 띄우기로 구분
이 시기 작가들은 방송국의 ‘시나리오 교본’ 을 통해 형식을 배웠다.
즉, 한국 드라마의 포맷은 학교가 아니라 방송국에서 태어난 문법이다.
2000년대 이후,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흐려지며 헐리우드식 ‘Screenplay Format’과 방송식 ‘대본 Format’이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디즈니+, 웨이브 같은 플랫폼은 한국 드라마 작가의 대본을 헐리우드식 shooting script로 변환해 사용한다. 한국적 감정선과 헐리우드의 구조적 문법이 만나는 지점 —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대본이다.
AI가 드라마 대본을 읽고 ‘영상’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인식하는 게 아니다. 그건 한 세기 넘게 이어진 시나리오 문법의 맥락을 이해하는 일이다.
‘S#12. 거실 – 밤’ 이라는 한 줄 속에는
촬영 공간, 조명 시간대, 감정 톤, 인물 동선이 모두 암호처럼 들어 있다.
AI가 그 암호를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대본은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변환되는 언어” 가 된다.
AI가 ‘한국 드라마 대본’을 영상으로 만들 수 있으려면, AI는 단순히 언어모델이 아니라 시나리오 문법을 이해하는 감독이 되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바로 “한국 대본 형식의 체계적 정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