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앞에서 피 흘리는 한국 드라마 제작사들
456명의 참가자가 벌이는 잔혹한 생존게임. 거대한 자본을 가진 VIP들이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드라마를 만든 한국 제작사들이 지금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무대는 강남의 고급 오피스텔이 아니라 상암동 제작사 사무실이다.
VIP는 금색 가면을 쓴 부자가 아니라 빨간 로고의 넷플릭스다.
그리고 456억 원이 아니라 편성을 놓고 벌이는 무한경쟁.
2016년 한국에 상륙한 넷플릭스.
처음에는 '또 하나의 OTT 플랫폼'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 생태계의 절대 강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이 전 세계적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제작사들에게는 새로운 현실이 다가왔다.
넷플릭스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
지상파 3사의 시청률은 계속 떨어진다. 케이블 채널들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청자들은 이미 넷플릭스로 넘어갔다. 제작사들에게 넷플릭스 납품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오징어게임에서 참가자들이 게임을 떠날 수 있었지만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제작사들도 넷플릭스를 외면할 수 없다.
한국에는 수백 개의 드라마 제작사가 있다. 각자 나름의 역사와 철학을 가진 제작사들이다.
하지만 넷플릭스 앞에서 그들은 모두 같은 처지다.
456번의 번호표를 받은 참가자들처럼,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다.
'살아남기'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선정되는 것.
그것이 현재 한국 드라마 제작사들에게는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문제는 모든 제작사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제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슬롯을 놓고 벌이는 무한경쟁.
오징어게임에서 456명 중 단 1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넷플릭스가 한국 제작사들에게 내놓은 첫 번째 게임. '톱스타를 캐스팅하라.'
넷플릭스는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다. 한국 드라마의 글로벌 어필을 위해서는 톱스타 배우가 필수다.
스타 캐스팅이 없으면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되기 쉽지않다.
문제는 이런 톱스타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작사들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출혈 경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캐스팅비가 폭등했다.
톱스타 한 명을 섭외하기 위해 제작사들이 치르는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징어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인 참가자들이 총에 맞아 죽었듯이, 톱스타 캐스팅에 실패한 제작사들은 하나둘 프로젝트에서 탈락한다.
톱스타를 캐스팅했다고 끝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글로벌 퀄리티를 요구한다. 헐리우드 수준의 제작비, 최첨단 장비, 해외 로케이션... 모든 것이 돈이다. 한국 드라마 한 편당 제작비가 100억 원을 넘나드는 시대가 왔다. 몇 년 전만 해도 20억-30억 원이면 충분했던 것이 이제는 그 서너 배가 필요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비교 수치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만드는 제작비가 일본에서 만드는 것보다 비싸졌다.
이것은 《오징어게임》의 달고나 게임과 같다. 섬세함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게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총에 맞아 죽는다. 제작비를 조금이라도 잘못 계산하면 프로젝트가 엎어진다.
넷플릭스는 데이터를 신봉한다.
전 세계 시청자들의 취향을 분석하고, 어떤 장르가 어느 지역에서 인기인지 파악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에 맞는 콘텐츠를 요구한다.
한국 제작사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넷플릭스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것인가.
《오징어게임》의 줄다리기 게임과 같은 상황이다. 팀워크가 중요하지만, 결국 한쪽은 죽어야 한다. 창작의 자유와 상업적 성공, 둘 다 잡을 수는 없다.
대부분의 제작사들은 넷플릭스의 요구에 맞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가장 잔혹한 게임은 따로 있다.
구슬게임. 가장 친한 사람과 팀을 이뤄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제작사들이 서로 경쟁해야 한다. 한정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자리를 놓고.
영세한 제작사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톱스타 캐스팅비를 감당할 자본이 없고, 넷플릭스가 요구하는 제작비를 마련할 여력도 없다.
결국 대형 제작사에 인수되거나 아예 사업을 접는다.
《오징어게임》에서 알리가 상우에게 속아 구슬을 빼앗긴 것처럼, 영세 제작사들은 하나둘 사라져간다.
징검다리 게임.
앞사람이 밟아서 깨진 유리를 보고 안전한 길을 찾아가는 게임. 하지만 맨 앞에 선 사람은 죽을 확률이 높다.
한국 제작사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지만, 그 길이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길이 정답인지 아무도 모른다. 맨 앞에서 길을 개척하는 제작사들은 실패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오징어게임.
어린 시절 친구였던 기훈과 상우가 마지막에 칼을 겨누는 게임.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도 마지막 게임이 진행 중이다. 살아남은 몇 개의 대형 제작사들이 서로 경쟁한다.
한때는 서로 협력하기도 했던 제작사들이 이제는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슬롯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제작사가 그 자리를 원한다. 최후의 한 자리.
《오징어게임》에서 진짜 권력자는 VIP들이 아니었다.
게임의 룰을 정하는 '일번' 오일남이었다.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 룰을 정하는 것은 넷플릭스다.
어떤 장르가 유행할지, 어떤 스타가 필요할지, 어떤 수준의 제작비가 적정할지. 모든 것을 넷플릭스가 결정한다. 한국 제작사들은 그 룰에 맞춰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룰을 거부하면 게임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왜 제작사들은 이 잔혹한 게임을 계속할까?
456억 원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돈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적 히트를 기록했다. 제작비 대비 수익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성공을 꿈꾸며 제작사들은 계속 게임에 참여한다.
글로벌 성공의 달콤한 유혹. 그것이 제작사들을 게임장으로 불러들이는 미끼다.
《오징어게임》에서 탈락한 참가자들은 장기를 적출당해 팔렸다.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 탈락한 제작사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보유하고 있던 IP들이 헐값에 매각되고, 핵심 인력들은 다른 제작사로 흩어진다.
회사는 사라지지만, 그들이 가진 가치있는 것들은 다른 곳에서 활용된다.
《오징어게임》에서 게임의 진짜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오일남의 심심함을 달래는 것이었다.
넷플릭스의 진짜 목적도 단순한 수익이 아닐 수 있다.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
각국의 제작사들을 자신들의 시스템에 편입시키는 것.
한국 제작사들의 출혈 경쟁은 넷플릭스에게는 일석이조다. 더 좋은 콘텐츠를 더 싼 값에 확보할 수 있으니까.
《오징어게임》에서 기훈은 살아남았지만 진짜 승자일까?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선정된 제작사가 진짜 승자일까?
성공한 제작사들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또다시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한 번의 성공이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결국 진짜 승자는 게임을 주최하는 넷플릭스뿐이다.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훈은 비행기에 오르지 않고 다시 게임의 진실을 파헤치러 간다.
한국 드라마 업계에도 탈출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자체 OTT 플랫폼 구축, 해외 직접 진출, 새로운 유통 경로 개발...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넷플릭스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자본력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넷플릭스는 이미 다음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AI를 활용한 콘텐츠 제작, 실시간 인터랙티브 드라마, 메타버스 콘텐츠...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게임의 룰은 바뀐다. 한국 제작사들은 또다시 새로운 게임에 적응해야 한다. 아니면 탈락해야 한다.
《오징어게임》은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그런데 그 디스토피아가 한국 드라마 업계에서 현실이 되었다.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 앞에서 제작사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다.
톱스타를 캐스팅하지 못하면 탈락.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면 탈락. 글로벌 트렌드를 읽지 못하면 탈락.
456명의 참가자 중 단 1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수백 개의 제작사 중 몇 개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안전한 곳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말할 것이다.
"재미있는 게임이군."
《오징어게임》을 만든 한국이 이제 진짜 오징어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 있을까?
"456명의 참가자는 가상이었지만, 수백 개의 제작사는 현실이다. 그리고 게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VIP = 넷플릭스 - 안전한 곳에서 관람하며 룰을 정하는 절대 권력자
456명 = 제작사들 -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참가자들
출혈 경쟁의 현실 - 톱스타 캐스팅비 폭등으로 인한 일본 대비 높은 제작비
제로섬 게임 - 한정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슬롯을 놓고 벌이는 무한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