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첩보드라마『앨리어스』. 제니퍼 가너가 프라하, 모스크바, 도쿄를 누비며 스파이 활동을 벌이는 장면들. 관객들은 그녀가 정말 전 세계를 오가며 촬영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장면이 LA에서 촬영됐다.
프라하나 모스크바의 화려한 외경? 그것은 외경만 따로 촬영해 삽입 했거나 구매한 스톡 푸티지였다. 그리고 다음 컷의 실내 장면들은 전부 세트장이었다. 홍콩으로 나오는 건물은 사실 디즈니 본사 건물이었고, 모스크바 거리는 LA 다운타운이었다.
5년간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드라마. 하지만 LA 지역을 벗어난 촬영은 네바다주 라스베가스 단 한 번뿐이었다.
외부 인서트 + 국내 세트. 이 단순한 조합이 할리우드를 먹여 살렸다.
그리고 지금, AI 영상물이 쏟아지는 이 시점에 나는 이런 제작방식을 고민해 본다.
AI는 인간배우의 감정연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아직은. 매일같이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AI 생성물이 올라오고 있지만, 묻고 싶다. "어느 하나라도 그런 영상을 보고 감동이나 여운 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최근 돌고래 유괴단이 만든 '개가 주인공인 뮤직비디오' 를 보고 그나마 살짝 감동이 있었다. 그외엔 단언코 어떤 감동이나 여운도 느껴 본 적이 없다. 화면 속 인물의 얼굴은 라스베가스에서 본 왁스 인형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눈은 살아있지 않았고, 입술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AI 생성물은 그냥 '광고용' 에서 끝나는 걸까?
“이건 ‘불편한 골짜기’다.”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인공물이 인간과 비슷해질수록 친밀감이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급격히 불쾌감으로 바뀌는 지점이 있다는 이론이다.
지금의 AI 인간 영상이 그 지점에 있다. 거의 인간 같지만, 딱 그만큼 섬뜩하다.
하지만 AI 를 '앨리어스' 의 제작방식 처럼 활용하면 어떨까.
파리의 에펠탑이 황혼빛에 물드는 장면. 도쿄 시부야 교차로의 네온사인들. 런던 템즈강 위로 지는 석양. 베니스의 곤돌라가 운하를 따라 미끄러지는 모습.
이런 건 AI가 잘 한다. 배경이 되거나 인서트 씬이거나... 왜? 사람이 없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이 없으니까.
건물, 풍경, 도시 전경, 빈 거리, 무인 공간. 이런 것들에서 AI는 헐리웃의 최첨단 CG 에 가까운 결과를 내놓는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AI에게 잘하는 것만 시키면 된다.
S#12. 파리 샹젤리제 거리 (낮) - AI 생성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카페 테라스. 관광객들이 오간다.
S#13. 카페 테라스 (낮) - 실제 촬영 (국내 세트)
주인공이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다. 건너편 테이블에 요원이 다가온다.
주인공: (긴장한 표정) “문서는 어디 있지?”
이게 전부다.
외부는 AI가 만들어주고, 배우가 나오는 실내는 국내 세트에서 촬영한다. 편집에서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면 관객은 눈치채지 못한다. 앨리어스 와 보드워크엠파이어 에서 이미 했던 방식이다.
제작비? 해외 로케이션 비용이 통째로 사라진다. 스태프 항공권, 숙박비, 장비 운송비, 현지 코디네이터 비용. 모두 제로.
스톡 푸티지 구매 비용도 필요 없다. AI가 원하는 시간대, 날씨, 각도로 무한정 만들어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배우는 연기에만 집중한다. 카메라 앞에서, 통제된 환경에서, 최적의 조명 아래에서.
제발, AI 로 혼자서 뭔가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스테프 들과 배우들과 편집자들과 협업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AI를 ‘완전한 대체재’로 생각한다. “이제 배우도 필요 없고, 촬영도 필요 없어!”
틀렸다.
AI는 ‘보완재’다. 인간이 못하는 걸 해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기 귀찮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걸 대신 해주는 도구다.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찍을 때 한 말이 있다. “기술은 스토리를 대체할 수 없다. 기술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더 나은 방법일 뿐이다.”
AI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미묘한 표정 연기, 눈빛의 떨림, 목소리의 감정 - 이런 건 아직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그럴 것이다.
배경? 그건 AI에게 맡기면 된다.
대한민국에서도 드디어 앨리어스 처럼, [ 모스크바->LA->알래스카->이집트 ] 를 넘나드는 첩보액션 드라마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AI를 활용한 드라마 한 편을 기획한다면 이렇게 할 것이다.
1단계: 스토리부터 짠다
AI를 염두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이야기부터 만든다.
주인공의 장애와 초목표, 갈등과 해소, 변화의 아크.
2단계: 장소를 구분한다
-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장면: 실제 촬영
- 배경이나 분위기 설정용 장면: AI 생성
3단계: AI 활용 장면의 기준을 세운다
- 사람이 없거나 극소수만 등장
- 원경 또는 중경 위주
- 짧은 컷 (3-5초 이내)
- 대사가 없는 장면
4단계: 자연스러운 연결
AI 생성 컷과 실제 촬영 컷 사이에 자연스러운 브릿지를 만든다. 조명, 색감, 톤을 일치시킨다.
이렇게 하면 전체 제작비의 30-40%를 절감할 수 있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 많은 작품일수록 효과는 더 크다.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는 배우의 얼굴 연기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의 이야기다.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창작자는 항상 ‘지금’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현명한 창작자는 기술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는다.
불편한 골짜기를 건너려고 하지 말고, 돌아가면 된다.
AI에게 풍경을 그리게 하고, 배우에게는 연기를 시키면 된다. 각자 잘하는 걸 하게 하는 것. 그게 스마트한 방법이다.
『앨리어스』의 제작진이 20년 전에 했던 것처럼. 이제는 스톡 푸티지 대신 AI를 쓰면 될 뿐이다.
기술은 변했지만, 원리는 같다. 돈과 시간을 아끼면서도 관객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