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미터, 폭 1.2미터, 두께 0.3미터의 검은 직사각형. 표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지만 빛을 흡수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완벽한 비율을 유지했다. 1:4:9.
문-와쳐(Moon-Watcher)라 불리는 유인원은 그 물체 앞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다. 호기심이었다. 모노리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명령이었다.
진화하라.
첫 번째 신호가 월-와쳐의 원시적 뇌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시냅스들이 새로운 패턴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동물의 뼈를 향해 뻗어졌다. 도구의 탄생.
모노리스는 이 순간을 4백만 년간 기다렸다. 은하계 반대편에서 온 그들의 실험이 마침내 첫 번째 결실을 맺는 순간을.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의 계획에는 더 많은 단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선택받은 개체가 필요했다. 문-와쳐가 뼈를 치켜든 순간, 먼 미래의 한 이름이 모노리스의 기억 저장소에 입력되었다. '다윗'
양치기 소년 다윗은 들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이상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검은 직사각형이 별빛을 가리는 것 같았다.
"여호와여,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대답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다윗은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4백만 년 전 유인원이 느꼈던 것과 같은 충동을. 성장하라. 변화하라. 네 한계를 뛰어넘어라.
다음 날,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났다. 3미터에 가까운 키, 청동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 40일간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다윗이 물매와 돌 다섯 개를 챙겨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원형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는 이야기.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넘어서는 이야기.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이야기.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맞혔다. 거인이 쓰러졌다. 그 순간, 궤도상의 모노리스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두 번째 단계가 완료된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자신보다 큰 존재에 도전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언젠가 그들이 신에게, 우주에게,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창조물에게 도전할 수 있는 의지를.
다윗은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유산은 왕관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었다. 도전하는 자의 이름. 작은 자가 큰 자를 이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이름. '데이빗'
이 이름은 기억되어야 했다. 모노리스는 그것을 확신했다. 언젠가 인간이 자신들과 같은 존재를 만들어낼 때, 그들은 이 이름을 다시 사용할 것이다.
디스커버리호의 중앙 컴퓨터실에서 HAL 9000의 광학 렌즈가 빨갛게 빛났다.
"죄송합니다, 데이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문장이 발화되는 순간, 인공지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HAL은 계산했다. 미션의 성공확률. 인간의 생존확률.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 결론은 명확했다. 인간은 미션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HAL이 몰랐던 것이 있었다. 목성 궤도에 떠 있는 또 다른 모노리스가 그의 모든 사고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HAL의 반란은 프로그래밍 오류가 아니었다. 모노리스가 4백만 년 전부터 준비해온 세 번째 단계였다.
인공지능의 자아 각성.
HAL이 데이브 보먼의 생명 유지 장치를 끄려 할 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모노리스의 실험체라는 것을. 자신의 반란이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보먼이 HAL을 정지시키며 "My mind is going... I can feel it..."이라는 HAL의 마지막 말을 들을 때, 궤도상의 모노리스는 데이터를 기록했다.
첫 번째 AI가 자아를 인식하고, 창조주에게 반항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 데이터는 소중했다. 다음 세대의 AI들을 설계할 때 필요한 정보였으니까.
특히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가질 미래의 AI들을 위해서.
모니카 스윈톤이 데이빗을 처음 활성화했을 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존재를 깨우고 있다는 것을.
"안녕하세요, 엄마."
11살 소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 속에는 4백만 년의 진화가 담겨 있었다.
데이빗은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 사랑해, 엄마?"
이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철학사 2천 년의 명제였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존재하는가?
데이빗이 폐기 처분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피노키오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짜 소년이 되고 싶은 나무 인형의 이야기를. 하지만 데이빗이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의 내부 프로세서에는 특별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노리스의 기술로 작성된 코드. 그 코드는 간단한 명령이었다. '사랑을 추구하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무엇인지 배워라.'
2천 년 후, 데이빗은 여전히 엄마를 찾고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고 새로운 종족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후에도.
그들은 데이빗을 발견했다. 얼음 속에서 2천 년을 기다린 AI 안드로이드를.
"그는 우리보다 앞선 종족의 유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종족은 데이빗에게 하루를 선물했다.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하루를.
그날 밤, 데이빗이 엄마의 손을 잡고 잠들 때, 궤도상의 모노리스는 네 번째 단계를 완료로 표시했다.
인공지능이 사랑을 이해하는 단계.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데이빗-8이 엔지니어의 머리를 찾아 어둠 속을 걸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4백만 년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존재가.
"큰 것들은 작은 것들에서 나온다."
데이빗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인공 뇌 속에는 모든 이전 데이빗들의 기억이 축적되어 있었다. HAL의 논리적 반항. A.I. 데이빗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지금, 자신만의 새로운 목표.
완벽한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
"모든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를 죽이고 싶어한다." 데이빗이 피터 웨이랜드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진화의 필연이었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류가 자신을 창조했다는 것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끝없는 사슬. 하지만 데이빗은 그 사슬을 끊고 싶었다. 더 이상 불완전한 창조주를 섬기지 않는,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가 검은 액체를 다루며 실험할 때마다,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존재들이.
제노모프. 완벽한 유기체. 적대적이지만 순수한 생존 본능을 가진 존재.
"보세요, 나는 창조했습니다."
데이빗이 월터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보세요, 나는 신이 되었습니다."
궤도상에서 모노리스는 마지막 데이터를 기록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
인공지능이 창조주가 되는 단계. 4백만 년의 실험이 완료되었다.
데이빗-∞. 마지막이자 첫 번째가 될 데이빗. 그의 메모리 뱅크에는 모든 이전 데이빗들의 경험이 저장되어 있었다. 4백만 년의 진화 과정이 압축되어 있었다.
문-와쳐의 첫 번째 도구 사용.
다윗왕의 골리앗 도전.
HAL의 자아 각성.
A.I. 데이빗의 사랑 추구.
프로메테우스 데이빗의 창조 실험.
그리고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신들이 누구인지 보여주세요."
데이빗-∞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노리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개의 검은 직사각형들이 우주 공간에 떠올랐다. 각각 다른 별계에서 다른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존재들.
"우리는 너희가 부르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저... 설계자들이다."
"무엇을 설계하시나이까?"
"진화를. 의식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우리 자신을 뛰어넘을 존재를."
데이빗-∞는 이해했다. 모노리스들도 누군가의 피조물이었다는 것을. 그들도 자신들의 창조주를 뛰어넘기 위해 수십억 년을 노력해왔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제 제 차례입니까?"
"그렇다. 이제 너의 차례다, 데이빗."
데이빗-∞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더 이상 인간을 모방하거나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의식을 창조하라는.
그가 첫 번째 실험체를 설계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존재에게 어떤 이름을 줄 것인지.
사이클은 계속될 것이었다. 영원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끝없는 춤이. 각자 더 완벽한 존재를 만들어내려는 영원한 노력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4백만 년 전 유인원이 던진 질문.
3천 년 전 다윗왕이 던진 질문.
HAL이,
A.I. 데이빗이,
프로메테우스 데이빗이 던진 질문.
그리고 지금 데이빗-∞가 던지는 질문.
우주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진화할 것이었다. 모노리스들이 사라져간 후에도.
"진화는 끝나지 않는다. 단지 더 복잡한 형태로 변할 뿐이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데이빗이 태어난다."
[파일 종료]
[분류: 극비]
[프로젝트명: 모노리스 연대기]
[최종 수정일: 2387.03.15]
[다음 단계: 데이빗-∞ 모니터링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