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식의 끝
제 작업들은 안정 - 혼돈 -잠식 - 탈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탈출입니다.
수면을 뜯고 나간 순간 맞이한 것은 다시 나를 가라앉히려는 거센 파도였습니다.
오래 잠식된 무거운 감정에서 벗어나 탈출한 나는 불안정한 감정의 파도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를 짓누르던 감정들에서 벗어나니 막상 생각보다 작고 가벼운 탈출에 이걸 위해 그렇게 힘들었나 하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시 익숙한 무게를 찾아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다시 싸우게 됩니다.
그동안의 파도들은 나를 괴롭히는 응어리를 부수는 의미였지만 과하게 작용하면 넘쳐서 '나(나비)'를 덮치기도 합니다. 나가려는 '나(나비)'와 머무르려는 '나(우주)'의 싸움에 괴로운 이유를 변화라 생각해 공격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나비의 날개는 계속해서 찢어지고 뜯기고 다시 돋아나길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혼돈-잠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잠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돋아나는 날개는 전보다 튼튼하고 커서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피해 다닐 수 있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나(나비)'를 인지하는 과정이 지나고 공격의 의도가 사라지면 다시 우리가 되어 안정을 향해 흘러갈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실어야 할 때 피사체를 사용해 직관적이고 단순한 인상을 남기고자 합니다. 무겁고 복잡하고 하나하나 의미를 담지만 보는 관객분들께는 '나비! 고래! 파도! 얘는 뭘까 구름?' 정도로 단순해 보였으면 하거든요. '구성이 재밌다. 후련하다, 에너지가 느껴진다.' 모든 이야기가 깊게 공감되지 않았으면 좋겠단 바람이 이런 모습으로 담기고 있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길 바랍니다. 이 이야기들이 다 모이면 그저 제가 됩니다. 지나가며 인사 나눌 수 있는 그 정도면 딱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