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컷(still cut),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을 골라 현상한 사진으로 홍보, 기념 등에 활용되는 사진들을 말한다. 여름이 코끝에 스치기 시작하는 5월의 끝자락, 우연한 기회로 신당의 어느 주점에서 스틸 작가의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평소 사진 촬영에 흥미를 뒀다기보다 셔터를 눌러 잊혀질 평소를 남겨 간직하기를 좋아했고 그렇게 남긴 몇 장의 사진들이 고등학교 동창 'J'를 통해 독립영화의 감독에게 닿았다. J는 그 영화에서 촬영을 맡았다.
아무리 발전을 거듭해도 오리지널을 따라잡기에 스마트폰은 갈길이 멀지만 들고 다니기에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큰맘 먹고 장만했던 카메라는 방 한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당연히 개인 sns에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훨씬 많았고, 이는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을 속이는 것만 같은 미량의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권태에 찌든 일개 회사원에게 인생에 변주를 줄만한 사건들은 일종의 불가항력이라서 죄의식 같은 건 들뜬 마음을 누르기엔 더없이 사소한 감정이었다.
작품에 함께하기로 한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눈을 깜빡여 본 지 오래된 카메라에 밥을 주었고 버튼과 다이얼을 연신 더듬어대며 사용법을 다시 익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카메라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이 스틸 작가로서 참여한다는 것은 우스운 아이러니였다.(다행히 훌륭한 커리어의 다른 스틸 작가도 있었다.)
촬영 당일, 로케이션 1층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배우의 안내를 받고 관계자들을 만나 간단한 담소를 나누면서 다른 배우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대기장소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배우들 간의 대화는 그간 품어온 직업에 대한 환상과 대척점에서 차게 뿌리를 내렸는데 흐려진 기억을 더듬어 옮겨보자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른 일도 같이하고는 있지만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아."
아주 잠깐의 정적. 새하얀 피부에 매력적인 매부리코를 가진 여배우가 꺼낸 얘기에 모두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말을 잊어버린 그들의 입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가까스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같은 고민과 결단 끝에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어쭙잖은 위로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갑자기 납덩이를 삼킨냥 마음이 무거워졌다. 현실을 흠뻑 빨아들인 꿈을 미처 다 품어내지 못해 두 손으로 질질 끌고 모인 사람들에 비해 나의 마음가짐이 너무 가볍지는 않았을까,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이 다시금 표면 위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부쩍 길어진 해는 좀처럼 지려하지 않으며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려주었다. 촬영지의 모두가 더위에 지쳐 짧은 휴식을 갖는 동안 나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편에 몸을 실었다. 가는 내내 신당에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마도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고민을 못 본 체 넘기지 못해 그랬으리라. 그리고 이는 그간 써온 글과 펜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뜯어살피게 했다.
방황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나 목도하고도 그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꿈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현실을 아득히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정의했다. 아무도 다녀간 적 없는 눈밭에 자신의 발자국으로 길을 만드는, 그만큼 불안정하고 위태롭지만 그렇기에 한발 한발 공들여 찍어보는, 업이 아닌 행위로써 다가오는 사랑. 그리고 발자국을 따라 밟아보는 해맑고 조건 없는 사랑.
그 사랑은 내가 설령 거울을 마주한 적 없는 나방일지라도 하늘을 누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날의 나는 극의 일부를 사진으로 남기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내게 닿은 진심은 영화 속 화려한 모습 이면에 언제라도 여전히(still) 계속될 그들의 발버둥까지 담아내고 싶게 만들었고 한 장의 사진이 무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내는 사람들을 덮어주었으면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가장 먼 곳에서 가장 큰 마음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마음은 나의 끼니까지 해결해주지 못해도 좋아하는 일을 내일도 해낼 수 있게 해 줄 만큼의 열량은 갖고 있다.
그러니 하루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걸어보는 건 어떨까. 매일같이 오가던 길에도 놓친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걷는 동안에는 지나친 고민도, 자기 연민도 휴대폰 옆에 같이 두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다.
"자기 연민은 늪 같은 거예요. 슬프고 괴로운데 중독성 있죠. 자기 자신한테 취하고 몰입하게 되고."
< 단편, 가을의 따뜻한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