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느 날 꽤 친한 편인 직장 동료 'C'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내게 물었다.
C : 요즘 퇴근하면 뭐 하면서 보내요?
나 :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는데 저는 이런 게 재밌더라고요. 자기 계발이요.
C : 연애를 안 해서 그러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를걸요?
그에게는 오랜 연인이 있었고 시간에서 비롯된 안정감을 연료 삼지 않는 연애를 했다. 아직 풋내 서린 사랑을 하는 그를 향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위아래로 휘저었지만 그건 단지 지난 연애사를 떠들어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일 뿐이었다.
20대 초반, 버스에서 삼킨 울음을 집 앞 골목에서 몰래 토하고 회사 옥상에서 하늘로 눈물을 틀어막았던 이별을 해봤다. 그 사람을 잊고 싶어 아무런 감정 없이 회사 선배를 만나보기도, 좋아하는 마음을 수년간 숨긴 채 친구로 지낸 짝사랑도 해봤다.
또 언젠가는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번호를 주고 간 외국인 알바생과 짧게 사귀어보기도 했다. 거듭된 사랑에서 각기 다른 쓴 맛을 봤음에도 행복의 한가운데에서 맛본 감미를 다시금 느껴보고자 기어코 도로 입에 집어넣고야 말았다.
지금은 덜어내어 준, 그러나 결국 바닥에 떨어져 버린 마음의 부스러기들을 도로 주워 담는 일에 피로를 느껴 반복적이고 굴곡 없는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 피로감은 비단 연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듯하다. 하물며 주운 부스러기는 조각을 잃어버린 퍼즐 같아 원래의 형태로 복원할 수 없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하루를 보내는 나를 또다시 연애의 수렁으로 이끄는 세 커플이 있는데,
한차례 내 글에 등장했던 'S'는 8, 9년째 교제 중이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녀가 받은 온전한 사랑을 큰 손실 없이 주고받는 안정적인 연애이다. 나의 지향점과 가장 일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동창 'O'는 우여곡절 끝에 만난 지금의 남자친구와 정석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 남자친구의 생일선물로 산 레인부츠를 시중의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사버렸다며 하소연하던 그녀는 아마도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사랑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자신을 등장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전 직장 동료였던 ‘P'는 연인이라기보다 부부에 더 가까웠다. 그들의 우여곡절이나 애틋함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작년의 결혼은 그들의 연애가 누구보다 묵직했음을 증명해 냈다.
이들은 식을 앞두고 청첩장을 주러 세종까지 내려와 주었고 그 마음이 고마워 서툰 솜씨로 저녁을 차렸다. 마음을 음식에 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요리에 소질 있나 하는 착각이 들만큼 맛있게 먹어주었다.
저녁을 마치고 산책을 하며 얘기를 나누다 문득 결혼의 동기가 궁금해져 물어봤다.
나 : 형은 왜 결혼을 하려는 거예요? 갑자기 계기가 궁금하네요.
P : 그냥 퇴근하고도 보고 싶어서, 퇴근 이후의 삶을 같이 하고 싶었을 뿐이야.
결혼을 결심한 순간을 묻자 돌아온 점을 찍는 것이 아닌 선을 그어버리는 예상외의 답변은 산책을 마치고 헤어지고도 질투 아닌 부러움으로 가득 찬 밤을 보내게 했다. 남의 결혼에 이토록 벅찰 건 또 뭐란 말인가.
해가 지날수록 받은 마음에 대한 사소한 보답이 어려워지는 까닭은 마음이 시간에 풍화되어 더 이상 무언가를 나눠줄 여력이 없다거나 작은 손해도 보고 싶지 않은(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은)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세 커플은 내게 이따금씩 영감과 충만감을 안겨주었고, 평소보다 따뜻한 글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사자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에게서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마땅히 손에 잡히지 않아 혼자 보내는 시간과 내면에서 유영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아주 가끔, 혼자 밥술을 뜨고 싶지 않은 날에는 괜스레 연락처를 뒤적여보곤 하는데 휴대폰에는 내키지 않거나 당장 만날 여건이 안 되는 이들뿐이었고 그런 날에는 조금 외로웠다.
퇴근 후 혼자 저녁을 먹은 여느 날, 기분전환 삼아 산책을 나가 좋아하는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높게 솟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하늘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밤은 종종 나를 센치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아직도 우울을 즐기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탓이었고, 그 벤치는 내게 깊은 굴과 같았다.
그날 나는 하늘을 보며 아빠다리로 연달아 하품을 했다. 나는 우울하면 하품을 많이 하는데, 아마 살아가며 우는 것 대신 채택한 방법인 듯하다.
그날은 유난히도 사랑이 하고 싶었다. 장르와 무관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를 사랑이라 칭할 수 있다면 그날 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언제 곁을 떠날지, 마음을 얼마만큼 덜어주는 게 맞는지 고민할 필요 없는 사랑. 그 감정은 대상을 찾아 헤맸고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한 생명을 키우는 데에 필요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덮어 가려버린 외로움 덕분에 '겨울이'는 해가 부쩍 길어진 초여름에 나의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