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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겨울 Jun 02. 2023

카우아이섬을 내달리는 사내

 어느 순간 글을 쓰는 것은 물론 긴 글을 소화시켜 내면에 자리시키는 일은 마이너한 취미가 되어버렸다. 다수의 사람들은 대단한 부를 바란다거나 풍요로운 노년을 영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는 직업의 생계를 무심하게 걱정 혹은 동정을 한다. 그들이 던지는 선망이 희미하게 섞인 시선과 질문은 프리랜서만이 누릴 수 있는 어딘가에 매이지 않은 보헤미안적인 생활방식과 비교적 높은 업무적 자유도에 그칠 뿐 그 이상의 고충이나 번뇌까지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다.


 코앞의 생계와 같은 삶의 시림을 외면할 수 없는 이들은 작가라는 직업이 갖게 되는 본질이 비단 글뿐만 아니라 경험, 사람, 향, 음악 등 향유하지 못하는 무형의 모든 것들을 읽어 문자화하는는 데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당연히 글쓴이와 창작물에 스며든 그의 혼을 결부시켜 사고할 수도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하며 통감한 저술업의 고충은 만족할만한 긴 호흡의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곱절의 글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글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은 세대의 일원이자 평범한 회사원의 일상을 가진 사람으로, 단지 창작을 사랑할 뿐이다. 어쩌면 독서는 저술에 대한 순애를 위해 행해지는 자기희생일 수도 있겠다. 혹은 소수가 즐기는 취미를 하고 있다는 데에서 얻는 우월감일 수도 있고. 그렇기에 작가를 향한 무신경한 관심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질문은 세상의 볼트, 너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기위로이자 기함이었을 수도 있다. 안정되지 않은 하루살이같은 치보다 때 되면 밥이 나오는 어항에 갇힌 자신이 그나마 낫다는 우짖음. 내 얘기이고 내 얘기였다. 정착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다시 꿈을 꾸기에는 짊어진 것들이 많아 풍화된 비석을 품고 가는 이들을 누가 뭐라할 수 있을까. 당연히 서서히 엷어지며 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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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만 아니라 짧은 영상이 활성화된 수많은 플랫폼들이 세상을 가르쳐주며 글의 쇠락에는 방점이 찍혔다. 손아귀에는 힘이 풀려 꿈을 움켜쥐지 못하고 열정의 부산물만이 널린 가슴을 지닌 사람들의 니즈를 보기좋게 엇나가는 취미의 말로를 지켜보자니 왜인지 울적해진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 심층 인터뷰를 준비 중인 저자를 환대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그 인터뷰는 그간 외면해 온 과거와 상처들을 의도치 않게 헤집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책을 내려놓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찔러 넣게 되었다.


 언젠가 차트를 장악했던 책은 자신을 가멸차게 궁지로 몰아내는 자기개발서였다. 그 다음에는 기계적이고 일률적이고 푸석한 위로를 늘어놓는 책들이 잘 팔렸다. 마치 카드사 고객센터의 상담원처럼. 주고받는 이, 양간에 일정한 책임감이 동반되어야하는 위로를 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의 내게는 깊게 배지 못할 단방향의 조언과 위로는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그러나 예정되지 않은 전화를 두려워하고 사람의 성향을 열댓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 지어 놓은 약도를 따라 벽을 짚으며 나아가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이들에게는 달리 받아들여졌다. 약간의 수수료만 지불하면 집이던 카페던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안식을 선사해 주는 '비대면 위로'는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현명한 소비가 되었고 그들은 글에 맺힌 미량의 습기를 빨아 마셨다.


 얼마 전에는 수익창출에 대한 컨텐츠들이 세간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소득은 욕망에 물을 길어다 준 반면 지갑은 굳게 잠가버렸는데 부의 축적을 다룬 글은 지갑문의 빗장을 너끈하게 뽑아버렸다. 이전의 자기개발서와 다른점이라면 패배감을 자극하지 않고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노하우들을 전수해준다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도 온전한 축하를 받지 못하는, 안정성과 꾸준함의 가치가 조금 바랜 이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빛나는 순간이 생면부지의 남에게 닿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성공의 비법서는 생계가 결합된 과시욕을 보기 좋게 겨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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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어떤 글을 내놓는 작가를 우수하다 평할 수 있을 것이며 제한된 자원으로 이전에 없거나 색다르게 생각을 엮어파는 보부상이 이뤄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일까. 사람과 기술의 발전을 녹인 시대의 정수를 써내야할까, 아니면...


 어떤 작가는 매일 아침  6시 45분에 울리는 알람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러고는 아마도 약간의 집안일을 마친 뒤 카페를 옮겨 다니며 다음에 발간하게 될 책을 준비한다. 그렇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사원 같은 균일한 루틴으로 차근히 매일을 쌓아냈고 두터운 팬층과 함께 현재 라디오와 강연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여담으로 그녀는 내 입에 담배를 물려준 사람이다.


 작가 '임경선'을 보며 나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영리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뛰어난 작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노력과 성실이라는 가치가 예전만큼 빛을 발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믿고 다음 발이 딛을 '다음 바닥'만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 나가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두 다리로 자신을 지탱해 내기 마련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건 잘풀린 당신이나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소리지, 대개는 노력의 인풋과 보상이 반비례하는 평범한 기구함을 맛보게될걸?"이라며 비아냥대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나로 금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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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 밥벌이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등단이라는 일종의 품질보증서가 있어도 사라졌던 이름모를 작가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 말은 작가로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는 '평생 펜을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쓰고 싶은 글을 원없이 써내며 배곯을 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건 저술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이상향이다. 마케팅의 부족, 바이럴이라는 행운의 부재와 같은 외부 요인들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파도를 타며 자신만의 올곧은 고집을 기반 삼아 끈질기게 글을 파는 사람이 끝내 자신의 묘비에 작가다운 그럴듯한 명언을 새기게 될 것이다. 결국 글쓰기도 엉덩이 싸움인건가, 내 엉덩이의 욕창이 더 크다 자랑하는 꼴이 되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정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나를 보니 아마도 죽기 전까지 글을 쓸 요량인가보다. 그 긴 세월 내내 유행을 좇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곤두세워도 도무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껍데기뿐인 글을 쓰면서 남은 일생을 보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차라리 노트북을 닫아버릴 것이다. 그만큼 작가에게는 페이스조절이 중요하다. 카우아이섬을 내달리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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