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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Jan 06. 2019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트프 백작과의 커피 타임

커피 읽는 여자의 커피 그리고 책

'커피'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떨린다.


나는 커피 대회 출전한 인기 커피인도 아니고, 커피를 미치게 잘 볶지도 못하고, 커피 기계를 잘 다루지도 못하고, 라테 아트를 죽여주게 잘하지도 못한다. 다만, '커피'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떨려서 그 사랑하는 커피를 읽어내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활자 중독자라 뭐든 읽어내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중 커피에 관한 글이라면 단번에 매혹되고 만다. 최근 읽은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커피에 관한 글 중 단연 백미였다. 그간 읽은 숱한 책들에서 커피라는 단어를 숱하게 사용했건만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처럼 커피를 사소하게 아름답게 표현한 문장은 아직 찾지 못했다. 커피를 치장하여 과찬한 표현은 여럿 보았다. 대놓고 커피, 커피 하는 책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는 전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커피를 무기로 내놓는다.


주인공 로스트프 백작은 격동의 러시아를 살며 호텔 강금이라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30여 년을 신사답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산 로스트프 백작은 결국 호텔 지붕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모든 게 완벽한 그날 밤, 로스트프 백작은 예상치 못한 지붕 위의 커피 타임에 초대받는다. 지붕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찰나 지붕 수리를 맡던 호텔 잡역부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시간은 그의 커피 타임이었다.    





<<지붕 위의 커피 타임>>


"저 커피를 준비할 수 있는데, 절 따라오실래요?"

나이 많은 잡역부가 백작을 데리고 지붕의 북동쪽 구석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있는 두 굴뚝 사이에 나름대로 터전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리가 세 개인 의자가 하나 있었고, 작은 불이 있는 화로도 하나 있었다. 커피 주전자가 화로 위에서 끓고 있었다. 잡역부가 골라잡은 자리는 썩 괜찮았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이면서도 볼쇼이 극장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

"커피 한 잔 따라드릴까요?"

"고맙습니다."

나이 든 잡역부가 커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백작은 지금 노인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끝내는 것일까,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커피가 딱 좋은 시점일 거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커피 한 잔 보다 더 많은 쓰임새가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커피는 새벽녘에 부지런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고, 정오에는 생각에 잠긴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밤중에는 괴로운 사람의 정신을 세울 수 있다.

"커피 맛 정말 좋네요." 백작이 말했다.

노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결은 원두를 가는 데 있습니다."

그가 L자형 금속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목제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끓이기 직전에 가는 거죠."

백작은 커피 문외한으로서 감사의 뜻으로 양 눈썹을 치켰다. 그랬다. 여름밤 옥외에서 마시는 노인의 커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203,204페이지 중에서


지붕 위의 커피 타임, 그 커피 한 잔으로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것처럼 로스트프 백작도 자신의 고향을 되짚어간다. 꿀벌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연 아니 필연적으로 그 꿀벌이 꿀을 물어 오는 곳은 로스트프 백작의 고향이었다. 커피를 마시다 로스트프 백작은 자살할 타이밍과 이유를 잊고 만다. 그리고 다시 삶을 이어간다. 그 커피 타임을 시작으로 로스트프 백작의 커피 타임은 매일 아침 사소하지만 아름답게 시작된다.




<<로스트프 백작의 커피 타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트프 백작은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그는 반쯤 눈이 잠긴 상태로 시트를 젖히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다음 다리가 세 개인 농에서 커피 원두가 든 양철통을 꺼내, 커피 그라인더에 원두를 한 스푼 넣고서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조그마한 손잡이를 계속 돌리는 동안에도 방은 여전히 미약하나마 수면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아직은 기세가 살아 있는 졸음이 시각과 감각, 형상과 형식, 얘기된 것들과 해야 할 것들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 각각의 요소에 제 나름의 비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이 그라인더의 작은 목제 서랍을 열자, 세상과 세상 속 만물이 연금술사들이 선망했던 바 - 갓 간 원두의 향-대로 바뀌었다.

바로 그 순간, 어둠과 빛이 나뉘고, 바다와 땅이 나뉘고 하늘과 지상이 나뉘었다.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고, 숲은 새들과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갖가지 벌레들의 움직임으로 부산스러웠다. 가까운 곳에서는 인내심 많은 비둘기가 지붕과 벽 사이의 빗물박이 등판에서 발을 끌며 걷고 있었다.


아삭아삭한 사과의 새콤함......

뜨거운 커피의 쌉쌀함.......

약간 맛이 간 듯한 버터의 풍미를 내는 향긋한 비스킷의 달콤함......

그것은 너무나 완벽한 조합이어서 백작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275, 276 페이지 중에서


이렇듯 사소한 표현이라니, 섬세하다고 표현해야 옳을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사소해 보였고, 사소해서 아름다워 보였다. 사소한 것들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했다고 할까. 커피에 관한 모든 행위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커피를 마시는 일련의 사소한 과정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으로 써내려 줘서 고마웠다. 물어보고 싶다. 작가 자신이 커피를 사랑하느냐고... 어쩜 이렇게 커피 타임의 사소함을 아름답게 표현해냈느냐고 묻고 싶고,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로스트프 백작과 여러 차례 커피 타임을 가졌다. 백작은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간단한 몇 가지 운동을 하곤 했는데 나 또한 백작과 커피 타임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스쿼시를 시작했다. 커피 내릴 물을  끓이고, 커피콩을 드르륵드르륵 박자에 맞춰 간다. 오늘 마실 커피에 맞는 잔을 골라 더운물을 담아 둔다.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모든 순간들을 가만히 기록하듯 내 눈에 담는다. 백작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다리가 세 개인 커피 테이블에 커피 잔과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고 과일 몇 알과 비스킷을 곁들인 커피 타임을 갖는다.


"로스트프 백작님, 저 커피를 준비할 수 있는데, 절 따라오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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