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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Sep 26. 2023

엄마,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어?

맥도널드에서 만난 부자 할아버지

아이가 7살 때부터 올해 13살이 되기까지 매년 꼭 함께 가는 행사가 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멈추고, 학교도 셧다운 되던 그 시절은 제외하고 말이다. 처음 아이와 그 행사를 함께 갈 땐 유치원에 다니던 꼬꼬마였는데 지금은 사춘기 청소년이 다 되었다. 거기에 작년까지도 나와 단둘이 참석하던 행사에 올해는 8살 동생도 함께 갔다.  


7살부터 13살까지 아이와 함께 가는 행사는, 바로 '서울국제도서전'이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 책을 많이 읽길 바라는 마음... 은 없다. 책은 사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많이 읽는다. 아이를 도서전에 데려간 이유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아이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서였다. 


첫째 아이는 아기 때부터 엄마가 일하느라 바빠서, 챙김을 잘 받지 못했다. 엄마가 이른 아침 출근하면서 어린이집에 자신을 맡기고, 늦은 퇴근으로 어린이집에서 제일 늦게 하원했다. 아이는 늘 엄마를 원했지만 엄마인 나는 늘 바빴다. 아이에게 '시간'을 내주지 못했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면,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어린이집 마당을 한 바퀴만 돌아달라고, 한 바퀴만 더 돌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도 손을 놓지 않고..."오늘 엄마 회사 따라가면 안 돼?"라고 말하곤 했다. 


퇴근하고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픽업하러 가면 아이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꼴등이야. 나만 남았어."라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엄마를 원망했다. 


저런 세월이 매일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7살이 되었다. 7살이 되던 해 봄, 아이를 데리고 뛰다시피 하며 어린이집으로 향하는데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살구가 열렸어. 엄마는 살구 좋아해?"라고 물었다. 나는,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5년째인데도 그곳에 살구나무가 있는 줄 그날 처음 알았다. 아이 말대로 위를 올려다보니 과연 살구가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섯 번의 봄을 살아오면서도 살구꽃이 피는 줄도 몰랐고, 살구가 열리는 줄도 몰랐고, 살구가 익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렸을 때 먹어봤는데, 달콤하고 맛있었던 것 같아. 좋아하는 건 모르겠네."

"나도 살구 먹어 보고 싶다."


그 순간이었다. 아이는 매년 봄, 살구가 열릴 때마다 살구꽃도 보고, 살구가 열리는 것도 보면서 살구가 먹어 보고 싶었는데 엄마인 나는 살구나무를 5년간이나 못 보았듯이 아이의 마음도 5년 동안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면서 그동안 후기만 보고, 정작 나는 한 번도 가려고 하지 못했던 '서울국제도서전'을 예매했다. 그리고 회사에 가서 연차 전자결제를 올렸다. 


아이는 평일에 엄마가 하루 쉬고, 자신은 어린이집에 안 간다는 것 그 자체로 엄청나게 기뻐했다. 둘째(첫째보다 다섯 살 아래로 2살이었다)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첫째와 길을 나섰다. 


"엄마, 살구가 떨어졌어."


아이가 말했던 살구나무를 지나는데 기적처럼, 선물처럼 살구 한 알이 떨어졌다. 노을빛이 담뿍 든 살구였다. 어디 하나 깨진 곳 없이, 온전하게 아주 실한 살구였다. 


"엄마, 살구 먹어도 돼?"


나는 근처 놀이터 개수대에 가서 살구를 씻어 옷에 슥슥 닦아 아이에게 먹어보라고 주었다. 


"맛있다. 엄마도 먹어봐."


아이는 한 입 베어 문 살구의 절반을 나에게 주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살구 진짜 먹고 싶었는데. 행운이다. 행운."


아이와 지하철을 타고 도서전이 열리는 삼성역 코엑스까지 가는 길, 아이는 '살구' 이야길 계속했다.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평일 오전이라 관람객들이 별로 없었다. 아이는 국립생태원, 과천과학관 등에 들러 체험을 즐기고, 팝업북 [나무로 만든 집]을 한 권 샀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아이에게 오늘 뭐가 가장 재밌었냐고 물었다. 


"살구 떨어진 거 너무 신기해. 행운이야. 행운. 너무 맛있었어."


아이와 온전히 함께했던 평일 하루, 그 시간으로 아이와 나의 관계는 끈끈한 신뢰가 형성됐다. 신뢰의 시작과 끝은 '살구'였다. 6학년이 된 아이는 지금도 '살구' 이야길 한다. 그리고 그때의 그 기분 좋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이후 아이와 매년 도서전에 간다. 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체험학습을 미리 신청해 학교를 하루 쉬고, 명목은 도서전 관람이고, 실체는 엄마와 '살구의 추억' 타임을 갖는다. 올해는 작은 아이까지 함께 살구의 추억에 동참하게 됐다. 그리고 올해는 '살구'를 능가하는 빅 이벤트가 하나 터졌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도서전에 갔다가, 점심시간에 코엑스에 있는 맥도널드에 들렀다. 코엑스 맥도널드는 키오스크 3대로 운영되고 있었던 터라, 주문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아이들이 원하는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 주스 종류 등을 주문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내가 주문을 할 줄 몰라서 그러는데 이 카드로 내 거 주문 좀 해줄 수 있어요?"


중절모를 쓴 노신사였다. 


"네네. 그럴게요. 어떤 걸로 주문해 드릴까요?"

"뭐가 맛있는데요?"

"주로, 빅맥 세트 많이 드시는데 그거 드실래요?"


노신사에게 빅맥 세트를 주문해 드렸다. 


점심시간이라 코엑스 맥도널드 매장 안은 혼돈 그 자체였다. 겨우 아이를 앉을자리를 구해 앉히고, 물티슈로 아이들 손 닦이고 보니 전광판에 어느새 우리 주문 번호가 떴다. 음식을 픽업하러 가는 길에 보니 우리 뒷자리에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픽업대에서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 아이들 가져다주면서 보니, 노신사는 주문한 번호표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저기 번호표 주세요. 제가 음식 가져다 드릴게요."


나는 음식 트레이를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고, 다시 노신사의 번호표를 들고 픽업대로 향했다. 


"여기요, 맛있게 드세요."


노신사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뭔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겸염쩍었지만 아이들 먹는 걸 봐줘야 했기에 서둘러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배가 고팠던 터라 햄버거를 정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어? 왜 엄마가 할아버지 햄버거를 갖다 줘?"


아이의 질문에 놀랐다. 아이의 눈에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싶어서 말이다. 두 아이에게 엄마의 친절에 대해 놀림(!)을 받고 있는데 노신사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다.  


"저기, 이거 내 명함이에요.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내가 중국에서 유학 사업을 하는데 아들들 유학 보내고 싶으면 여기 내 명함, 전화로 연락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두 아이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고? 이런 거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 아니야. 친절을 베풀었더니 알고 보니 부자..."


아이들은 그날 내내 '맥도널드에서 만난 부자 할아버지'이야기를 했다. 아빠에게도 하고, 사촌 형에게도 전화해서 말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내년부터 도서전에 가면 아이들 둘이 '맥도널드에서 만난 부자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겠다. 첫째와 나만의 추억이었던 '살구'에서 이제 첫째와 막내와 나까지 셋의 추억으로 '맥도널드에서 만난 부자 할아버지'가 살구의 추억을 잇는다. 



+

맥도널드에서 만난 부자 할아버지의 명함으로, 첫째 아이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나도 살짝 의심이 갔는데 아이의 검색에 의하면 진짜였다. 다행이다. 아이의 추억에 금이 가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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