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카페인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고귀한 것은 자유의지라고 철학자들은 말하더라만, 내게는 그 자유의지 보다 더 고귀한 하이퍼 의지가 있었으니, 그건 카페인 의지였다.
나는 커피를 사랑하지만, 커피에 완전 중독되었지만, 내가 카페인 의존자인 줄은 몰랐다. 카페인이 내 몸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커피를 처음 마신 건 12살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아침마다 MAXIM이라고 적힌 진한 갈색 머그잔에 커피를 마셨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이 아닌 머그잔을 빤히 쳐다보는 걸 아셨는지, 어느 날 내게 빈 머그잔을 주면서 교사 휴게실에 가서 커피를 타다 달라고 부탁하셨다. "유리병 세 개가 있는데, 까만 게 커피야, 그거 2개 넣고, 프리마 알지? 그거 2개 넣고, 설탕도 2개, 둘둘둘? 외우기 쉽지?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머그잔에 손가락을 짚으며) 이만큼 뜨거운 물을 붓고 숟가락을 잘 저어 오면 돼."
내가 만든 커피!
그건 내가 처음 만든, 커피였다. 선생님의 심부름은 그때 딱 한 번이었다. 나는 내심 선생님의 커피 심부름을 기대했는데 웬일인지 선생님은 내게 커피 심부름을 그날 이후 시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커피의 세계가 너무나 궁금했다.
"너, 교사 휴게실 청소 할래?"
내 마음을 알았는지, 선생님은 청소 구역을 바꾸는 날 내게 교사 휴게실 청소를 맡겨 주었다. 나는 너무너무 신이 났다. 교사 휴게실 청소를 하면서 나는 커피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프리마, 그리곤 드디어 선생님처럼 커피 둘, 프리마 둘, 설탕 둘을 넣고 커피를 제조하고 마셔보기에 이르렀다.
"아흐... 퉤퉤..."
이게 무슨 맛인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첫 커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쓰고, 느끼고, 몹시 역겨운 맛이었다. 이 맛없는 걸 선생님은 왜 마시는 거지? 그것도 매일. 선생님의 커피가 더 궁금해졌다. 역겨운 커피를 마시고, 나의 의문은 더 커져갔다. 나는, 제조법을 달리 하며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타보기 시작했다.
"아, 맛있어."
나는 선생님이 왜 내게 커피 심부름을 한 번만 시켰는지, 왜 선생님이 매일 커피를 마시는지 드디어 알게 됐다. 그건 레시피의 차이였다. 같은 둘둘둘이라도, 그 양은 미세하게 달랐고, 물 양도 미세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를 인용하자면, '맛있는 커피는 모두 엇비슷하고 맛없는 커피는 맛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너 커피 마셨지?"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 뜨거운 얼굴의 온도를 내 몸은 지금도 기억한다.
"커피 마시면 멍청해져. 프리마는 먹어도 되지만 커피는 마시지 마. 어른되면 마시자."
선생님은 다음 날 내게 빈 머그잔을 주면서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그다음 날도. 나는 알았다. 이제 나는 커피 제법 잘 탄다는 것을.
열두 살, 커피에 입문한 나는 이제 43살의 중년이 되었다. 그동안 커피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커피가 너무 좋아서 카페를 열었고, 커피 회사에도 다녔다. 밤에 자면서도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아침이면 커피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나는 늘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늘 커피를 마셨다.
30대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나의 커피 라이프는 안전했다.
하지만, 40대가 되니 나의 수십 년 커피 라이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눈 밑이 떨리고, 팔부터 손가락에 이어 엉덩이까지 저리고 찌릿한 증세가 나타났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일주일, 이주일 계속됐다.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 커피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잠을 못 자요? 커피 많이 마셔요?"
의사는, 단박에 커피 부작용, 카페인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커피를 당장 중단할 것과 마그네슘을 처방해 줬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30년 동안 커피를 마셔왔지만, 나는 커피 때문에 잠을 못 자거나, 커피 때문에 이상 증세를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커피를 안 마시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임신 중에도, 나의 주치의는 커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 하루 한 잔의 커피를 허락해 주었고, 수술 후에도 한 모금의 커피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 커피가 내 몸을 위협하고 있다니...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청천벽력일 것이다.
커피의 신에게 버림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없다는 것... 나는 그날 내가 늙었다는 것을, 내가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겐 이제 카페인 의지가 없어졌다. 나의 막강한 자존감이었던 카페인 의지가 꺾여버렸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없다더니, 커피 라이프가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 나는 커피를 자유 의지 껏 마시지 못한다. 카페인 의지가 허락하는 만큼만 마실 수 있다. 그것도 어느 날은 카페인이 아니라 디카페인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중년의 몸은 카페인 의지가 몹시 약하다.
나에겐 하이퍼 카페인 의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