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추억의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대학생 시절이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커피=자판기로 통했다. 간혹 자판기를 발견하면 나의 추억이 깃든 자판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론, 이제는 카페 아메리카노에 길들여져서 달달한 자판기 커피에는 손이 가질 않지만... 자판기 커피를 보면 K교수와의 일화가 생각난다.
점심시간은 커피 자판기가 하루 중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이날은 특히나 자판기 커피의 줄이 길었다. 나도 그 줄 꽁무니에 가서 섰다. 한참을 기다리고 섰는데 자판기가 있는 1층 모퉁이를 향해 계단참을 돌아 내려오고 있는 K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K교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대학뿐 아니라 전국구 유명 교수였다. 책을 정말 부지런히 냈고,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 되었다. 글도 잘 쓰고, 언변도 탁월했다. 나도 그 인기를 익히 들었기에 일반선택으로 K교수의 강의 하나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K교수는 정말이지 말을 잘하는 교수였다. 또한 책과 TV, 신문에서 보던 얼굴보다 훨씬 잘 생긴데다, 키도 훌쩍 크고, 아직 젊은데도 백발이었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너무도 멋있어 보였다. 강의는 전공 수강생들보다 일반선택 혹은 청강 학생들이 많아서 단대에서 가장 큰 강의실을 사용했다. 강의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무엇보다 알찼다. 보기 드물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강의였다.
어느 날인가는 K교수가 강의에 5분 정도 늦은 적이 있었다. K교수는 늘 정각에 강의를 시작했었다. 전날 신간 도서를 읽다가 너무 재밌어서 밤을 꼴딱 새워서 읽고는, 아침에 잠시 눈을 붙이다 늦었다며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대신, 그 재밌는 책의 제목과 내용을 특유의 말빨로 풀어내었다. 나는 결국 강의가 끝나고 바로 구내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사고야 말았다.
K교수는 1층 계단을 내려오려다 커피 자판기 앞 긴 줄을 보고 잠시 망설이는 눈빛을 보이더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K교수의 뒷모습엔 아쉬움이란 꼬리표가 길게 늘어져있었다. 자판기 앞 줄이 한 사람씩 줄어드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K교수 커피를 한 잔 뽑아다 줄까? 말까? 괜히 오버하는 거야? 아니 뭐, 커피 한 잔 뽑아 다 주는 게 뭐 어때서... 갈등하고 또 갈등한다. 결국, 커피를 2잔 뽑는다. 내 몫의 커피 한 잔은 K교수 연구실에 가는 동안 다 마시고, 드디어 K교수 연구실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교수들은 으레 연구실 문을 두드리면, 잠깐의 뜸을 들인 후
"네! 들어오세요."라고 응수한다.
나는 문을 빼꼼히 열고,
"저기, 아까 자판기 커피 드시려다 줄 길어서 그냥 가시길래, 제꺼 뽑으면서 뽑았어요."
그리고, 문 밖에서 연구실 안으로 자판기 커피가 들린 손을 쑥 내민다. K교수가 버선발은 아니고, 그 큰 키로 갑자기 연구실 의자에서 쑥 일어났다.
"아이코... 고마워라.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커피 마시고 싶어서 다시 내려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럼, 여기 커피..."
"너무 고마워서..... 자 들어와요. 들어와."
"아니, 저는 그저 커피만..."
"아니, 아니 내가 뜻밖에 너무 고마워서,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책 좋아해요?"
"아닌데... 아니... 아닌데..."
"책 좋아할 것 같은데 맞죠?"
"책은 좋아하는데..."
K교수 연구실은 책이 책꽂이뿐 아니라 바닥이고, 어디든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책으로 쌓여서 뒤덮여 있었다. K교수는 그 책들의 무질서한 레고 속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을 주섬주섬 챙겼다. 무려 3권이나.
"이걸 받아도 되나요?"
"그럼요. 커피 한 잔 덕분에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데요. 진짜 고마워요."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K교수는 그 사이 명예교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부지런히 책을 내고 있다. K교수도 이제 점심시간이면 자판기 커피를 더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래도 책을 읽고 쓰면서 여전히 커피는 마실 터이고, 어느 날인가 수십 년 책 3권과 바꾼 자판기 커피 한 잔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