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가기 좋은 시간

전직 카페 사장이자 카페 중독자가 추천하는 카페 가기 좋은 시간

by 커피 읽는 여자

카페 사장이었을 때 가장 슬펐던 순간은 손님이 없는 순간이 아니었다.




11시쯤이면 오픈해서 분주한 아침 손님 치르고 하루치 장사 준비를 위한 재료 손질이 끝날을 무렵이다. 이제야 숨 좀 돌리며 12시부터 시작될 하루 중 가장 격렬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손님이 올 때가 가장 슬픈 순간이다.


11시 손님은 손님이 아니라 나의 슬픔에 동참하는 벗이 된다. 11시 무렵에 오는 손님들은 신기하게도 대개 나처럼 슬픈 사람들이었다. 11시는 커피를 마시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12시 점심을 앞두고 있고, 이미 아침의 커피를 한 두어 잔 마셨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1시의 손님들은 아주 드물다.


이건 내가 대학로 앞, 개인 커피숍을 운영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커피가게가 구멍만 해서도 아니다. 나는 첫 카페인데도, 돈도 없는데도, 열 평도 안 되는 가게는 애당초 생각도 안 했다. 40평은 넘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창고까지 갖춘 45평짜리 카페를 열었다. 인테리어도 역시나 처음이고, 돈이 없으니 어지간하게 했을 거라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당시 나의 능력치를 훨씬 뛰어넘는 아주 멋들어진 인테리어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이 멋졌다. 언제 그렇게 허황되게 아름다운 카페를 가져볼 수 있겠는가? 인테리어에 억 대의 돈을 쓰고 대학로 비싼 월세를 내는 자리에 카페를 개업했다.


이런 카페에 11시에 손님이 없다.


그리고 그 카페 사장인 나는 손님이 없는 11시를 몹시 사랑하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커피 회사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남 한복판 최고로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곳, 한 달에 수 천만 원의 임대료를 내는 카페도 오전 11시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카페 사장으로 11시에 하는 일은 딱히 없다. 그냥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다.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처럼 말이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김사인




11시는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의 손님은 철 이른 낙엽 같다. 아직 점심을 먹기에도 식후 커피를 마시기에도 이른 시간인데... 11시의 손님들은 가만히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던 일,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에 동참한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워서 11시의 손님들은 잊을 수가 없다.


카페에는 바가 있어서 단골손님들은 주로 바에 앉았다. '대화'라는 것을 나누기 위함이다. 그런데 11시 손님들은 카페가 텅 비어 있는데도 바가 아니라 멀찍한 곳들, 내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앉는다. 11시 손님들은 수줍음이 많다. 나는 카페를 한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아마도 이 수줍음은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관련될지도 모르겠다. 안 그런 척할 뿐이지 자존감이 그리 높지 못하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슬퍼지고 슬퍼지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시간이 11시라면 자존감의 눈금이 0 아래도 떨어지려 파르르 떨리고 있을 때다. 너무 염려는 안 해도 된다. 12시가 되면 거짓말(진짜 거짓말이다)처럼 자존감이 최대치로 튕겨 오른다(거짓말로 올리고 있다). 손님들이 밀려드니까, 빌지가 자꾸 쌓이고, 빤스가 홀딱 젖으니까 자존감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다.


11시의 손님 중에 영어교육학과 외국인 교수 로렌스가 있었다. 수줍음이 많던 그는, 손님이 별로 없고,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흘깃거리지 않을 곳을 찾다가 나의 카페에 오게 되었다고 아주 나중에 11시가 아닌 시간에 와서 굳이 밝혔다. 로렌스는 내가 추천해 준 커피가 맛있었고 내가 아주 슬퍼 보였고 덕분에 자신도 마음껏 슬플 수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11시 손님들에게 받았던 '위로'를 손님들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로렌스는 그 후로 종종 카페에 들렀는데 어느 날은 방학이라 필리핀에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러 간다고 또 굳이 말하러 오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함께 저녁을 먹자고도 했고, 미국에 박사 과정을 밟으러 가게 되었는데 또또 굳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11시 손님은 때로 흑심을 품기도 하다 보다. 그건 11시 손님의 품위에 어긋나지만 귀여운 행동이라고 일러둔다.


11시 손님들의 커피를 만들 때는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11시는 나의 커피 타임이기 때문에 실은 내 커피가 손님 커피가 되고, 손님 커피가 내 커피였기 때문이다. 손님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시키든 케냐 AA를 시키든 내 몫까지 내렸다. 혹은 내 커피를 정말 혼신의 힘들 다해 내리고 있는데 손님이 오면 내 몫의 커피를 손님과 나눠 마셨다.


강남역 삼성타운에 있는 커피 회사에서 일할 때, 11시 손님들은 주로 카페 인근에 있던 삼성의 임직원 그중에서도 차장급들이었다. 차장급들은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와서 뽐내듯 법카로 커피를 사 마셨고, 직원들은 법카를 긋는 차장에게 굳이 매일 "차장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여하튼 11시에 오는 차장급 손님은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떼로 오지 않는다. 친한 차장이나 과장과 단둘이 주로 온다. 이때는 개인 카드를 쓴다. 나는 그 차장급 손님들에게 사이즈를 업 해주거나 간단한 디저트인 에클레어나 마카롱을 서비스로 주었다. 굳이 대가라고 표현하고 싶지은 않지만 하여간 그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회사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그러니까 카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단골 차장급 손님 중에 한 분이 어느 날부터 발길이 뜸해졌는데, 출장을 다녀오느라 그동안 못 왔다고 굳이 와서 밝혔다. 그 차장급 손님 중 또 한분은 회사를 그만둔다며 굳이 나를 찾아 인사를 하고 갔다. 그 차장 손님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그 밑의 직원들이 한 둘씩 11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11시에 카페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차장에게 학습한 효과다.



11시 손님 중에 에스프레소 선생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백발의 중년 남자 손님이셨는데 늘 11시쯤 오셔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셨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커피 전문점에서도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손님은 아주 드물었다. 그것도 매일 아침 11시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멋진 중년이라면 더더군다나.


그분이 어느 날 내게 물어왔다.


"같은 커피 전문점인데 왜 다른 데선 이 맛이 안 나요?"


"비 오는 날엔 커피 맛이 달라져요?"


"오늘은 에스프레소를 벌써 두 잔이나 마셔서 다른 거 마셔보고 싶은데 아메리카노는 싫고......"


이런 질문들이었다. 같은 커피 원두를 쓰고, 같은 매뉴얼로 만들어도 그 커피를 다루는 바리스타의 숙련도에 따라 커피 맛은 달라진다. 물론, 그 외에 수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변수를 철저히 관리하는 대기업 프랜차이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비 오는 날은 왜 커피 맛이 다를까? 그건 커피가 습도에 민감해서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비 오는 날은 여름 장마철이 아니라면 그리 흔한 날씨가 아니고, 인간은 날씨에 예민해서 해 뜨는 일상에 비해 몸의 생체 반응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세 번째 질문인 에스프레소 말고, 아메리카노는 싫고... 에 대한 답은 '롱블랙'이었다. 롱블랙은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유래된 커피로 아메리카노와 비슷하지만 아메리카노에 들어가는 에스프레소 샷보다 샷을 좀 더 짧게 뽑아 쓴맛과 바디감을 줄이고 물 양도 아메리카노보다 100ml 정도 적게 들어간다. 스타벅스로 치자면, 기본 톨 사이즈보다 작은 숏 사이즈 정도, 투썸플레이스에서는 롱블랙이라는 음료를 팔기도 하고, 롱블랙 전용 잔도 있다. 아메리카노 레귤러(스타벅스 톨 사이즈) 사이즈가 355ml, 롱블랙은 원사이즈로 237ml이다. 롱블랙은 아메리카노 레귤러 사이즈보다 진하고 물이 적게 들어가 전체적으로 양이 적다. 경험상 양이 적어 다 못 마시고 버릴 염려는 없다.


에스프레소 선생님 고객은 내가 추천해준 롱블랙을 마시고 나서


"이렇게 맛있는 메뉴가 있는 걸 몰랐네요. 아주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이후 종종 에스프레소 대신 롱블랙을 시켜 드셨다. 어느 날은 함께 온 일행이 아메리카노를 시키려 하자 일행에게 롱블랙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롱블랙 전도사가 된 것인가?


나는 지금 카페 사장도 커피 회사의 직원도 아니다. 나는 11시 손님이 되었다.


11시면 동네 단골 카페에 가기도 하고, 새로 생긴 카페에 가기도 한다. 역시나 11시는 손님이 없다. 내가 카페 사장이었을 때나 커피 회사 직원이었을 때나, 손님이 되었을 때나 말이다. 11시 손님으로 카페에 가면 카페 사장이나 직원은 아무 기대감이 없는 얼굴로 정말이지 앞에 인용한 김사인 시인의 이른 낙엽이 떨어진 것처럼 가만히 나를 맞는다. 에스프레소를 시켜도, 카푸치노를 시켜도, 드립 커피를 시켜도 하나같이 서두른 흔적이 없는 커피를 내어준다. 11시는 내가 카페 사장이었을 때나 카페 손님이었을 때나 바쁜 적이 없는 시간이다. 나는 가끔 11시에 카페에 가서 코스로 커피를 주문하기도 한다.


"에스프레소 먼저 주시고, 다음에 드립 커피, 마지막으로 플랫 화이트 이렇게 주세요."


사장님이 놀란다.


"일행이 또 오시나요?"


"아니요. 저 혼자 마실 거예요. 천천히 주셔도 돼요."


세 잔의 커피는 각각 시간차를 두고 온 세 명의 손님들의 메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세 잔의 커피를 한 잔, 한 잔 코스로 마시고 집에 가기 전에는 원두고 사고, 내가 마신 커피가 인상적이라면 꼭 소감도 전한다. 최근에 커피 리브레 타임스퀘어점에 11시 손님으로 가서 바리스타에게 이렇게 전했다.


"플랫 화이트가 정말 완벽했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감사드려요."


순간 나는 느꼈다. 바리스타도 11시의 손님처럼 수줍게 기뻐하고 있음을......


12시,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11시 손님은 이제 퇴장한다.